한인임 선생님께서 18일 감정노동자 보호법 시행을 앞두고 한겨레에 기고한 글입니다.


[기고] 보호하지 못하는 감정노동자 보호 메뉴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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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보호하지 못하는 감정노동자 보호 매뉴얼


한인임
감정노동자보호입법을 위한 전국네트워크 정책팀장

오는 18일부터 1인 이상 사업장에서 일하는 모든 감정노동자들에게 보호법이 적용된다. 이 보호법은 산업안전보건법 ‘26조의 2’(고객의 폭언 등으로 인한 건강장해 예방조치)로 자리잡았다. 감정노동자들은 고객과 직접 대면하는 노동 과정에서 과도한 친절을 요구받거나 심지어 폭언, 폭행, 성폭력에 노출되면서도 제대로 자신을 보호할 수 없는 처지에서 일해왔다.

감정노동자 보호를 사업주의 강력한 책임으로 만들기 위해 애초 노동·시민사회에서는 벌칙이 강한 산업안전보건법 ‘24조 보건조치’에 이 조항을 넣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지만 결국 26조에 편제되었다. 감정노동자 보호 중 가장 시급한 것이 ‘폭언, 폭행, 성폭력’ 등으로부터 우선적으로 피할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는 데 이견이 없어서 크게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다. 26조는 ‘작업 중지’ 조항이다. 노동자가 업무 중 위험 상황을 인지했을 때 업무를 중단하고 피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26조의 2’에 따르면 사업주는 감정노동자 보호를 위해 각종 예방조치를 취할 의무, 피할 권리를 요구하는 노동자의 의견을 수용할 의무, 위험을 인지하면 피하게 해야 할 의무를 동시에 지고 있다. 사업주의 예방조치에는 법의 취지에 걸맞은 고객응대 매뉴얼을 만들어 보급하고 교육하는 것도 있다. 고객이 감정노동자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도록 안내와 홍보도 의무화하고 있다.

이미 몇몇 대기업에서는 이 법에 따라 고객응대 매뉴얼이 제작돼 배포되고 있다. 그런데 최근 입수한 몇몇 대형 유통업체의 감정노동자 보호 매뉴얼(업무 매뉴얼)을 살펴보면 입법 취지가 실종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대형마트에서 만들어진 매뉴얼에 따르면 무원칙한 ‘이슈 고객’(합리적 문제 제기가 아닌 내용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고객)으로부터 폭언, 폭행, 성희롱 등을 당할 경우 무려 6단계에 걸쳐 의견을 개진해야 상급자에게 문제가 넘어가는 형국이다.

1단계(정중한 어조로 중지 요청)→2단계(단호한 어조로 중지 요청)→3단계(녹음 또는 녹화 안내)→4단계(다시 한번 중지 요청)→5단계(처벌받을 수 있다는 안내)→6단계(응대 종료 안내)→7단계(관리자에게 내용 공유).

이런 상황이면 이미 들을 욕 다 듣고 맞을 만큼 맞은 상태일 것이다. ‘피할 권리’에 초점을 둔 이 법이 폭력을 경험한 뒤 정신적 트라우마에 시달릴 가능성을 낮추기 위한 법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없어도 되는, 없어져야 할 매뉴얼이다. 특히 이 매뉴얼의 내용은 법에서 명시하는 피할 권리를 유예시키는 내용이므로 오히려 법을 위반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또 백화점에서 나온 매뉴얼에는 고객이 폭력을 행사할 경우 증거 수집 단계가 너무 복잡해 사실상 현장에서 사용할 수 없는 구조로 만들어져 있다. 가해자의 인적사항을 모르는 경우 도주할 우려가 있는데도 백화점 쪽에서는 필요할지 모르는 인신 구속에 대한 준비는 전혀 하고 있지 않다. 특히 전화 응대의 경우 가장 간단한 예방조치로 시그널 멘트(통화 시작 전 ‘이 대화는 녹음되고 있습니다’를 알림으로 제공 등) 정도만 넣어도 그 효과는 매우 큰데, 한참 욕을 먹고 난 뒤 녹음하겠다고 얘기하는 것이 어떤 예방효과가 있을지 알 수 없다.

정의로운 노동과 소비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고자 하는 감정노동자 보호법, 시작도 되기 전에 허울만 남은 껍데기로 보이는 것이 과도한 우려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