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노동조합운동사 I
1. 노동조합운동의 역사를 어떻게 볼것인가
2. 일제하의 노동조합운동
3. 해방정국의 노동조합운동
4. 1950년대의 노동조합운동
5. 1960년대의 노동조합운동
6. 1970년대의 노동조합운동
7. 87년 전야의 노동조합운동
한국의 노동조합운동사 1
1. 노동조합운동의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제 1강의에서 확인하였듯이 노동자란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 댓가로 임금을 받아 생활하는 사람이며 노동조합이란 노동자가 주체가 되어 자주적으로 단결하여 근로조건의 유지, 개선과 복지증진 그리고 노동자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 향상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입니다. 따라서 노동조합운동의 역사는 개별적인 노자관계를 넘어서서 그 나라의 총자본과 총노동과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노동자들의 단결과 투쟁에 관한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한 나라의 노동조합운동의 역사는 기본적으로 그 나라의 자본주의 발전의 역사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으며 동시에 민주주의 발전의 우여곡절과 수준이 깊게 반영된니다. 곧 노동조합운동이 갖는 세계적인 보편성과 그 나라의 정치 경제적 조건에서 비롯되는 특수성이 양 측면을 이루며 한 나라의 노동조합운동사가 엮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 노동조합운동의 역사는 단절의 역사입다. 일제 하와 해방정국의 노동조합운동은 물론 제 1공화국에서 제 5공화국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노동조합운동은 항상 정치적 격변의 종속변수였으며 그 결과는 이전 운동과의 단절이었습니다. 실제 한국 노동조합운동의 나이테만큼 굵고 진한 검은 줄을 여러개 갖고 있는 경우도 드뭅니다. 거의 주기적으로 찾아 온 노동조합운동의 겨울은 그만큼 한국 노동조합운동의 발전을 위축시켰으며 이 운동이 대중적으로 확산되는 것을 가로막았습니다. 한국 노동조합운동이 대중운동으로서의 본연의 모습을 되찾기 시작한 것은 1987년 여름의 전국적인 파업투쟁 이후부터입니다. 80년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운동이 정상적인 발전의 궤도 위에 오른 것은 불과 6년 전의 일인 것입니다. 한국노동조합의 역사를 87년을 분기점으로 전사와 후사로 나누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2. 일제 하의 노동조합운동
조선에서 자본주의적 경영이 출현한 것은 18세기 후반 광업분야에서 였습니다. 그러나 임금노동자의 투쟁으로 기록에 남아 있는 최초의 투쟁은 1887년 6월 함경도 갑산군 초산역에서 일어난 광업 노동자의 투쟁입니다. 기록에 남아있는 최초의 노동조합은 1898년 함경도 성진에서 세워진 성진본정조합입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노동자들이 늘어나고, 노동조합이 만들어지고, 노동조합운동이 시작된 것은 일제의 조선반도에 대한 침략 이후 근대적인 산업이 발전하면서부터였습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발달된 공업에서의 노동조합보다는 주로 광업, 부두, 인쇄, 고무, 양말공장, 평양 같은 경우의 면옥노동조합(냉면집)이 활발했습니다.
당시의 노동조합은 대단히 활발한 활동을 했는데, 그 정도를 보면 작년에 우리나라에서의 쟁의건수가 약 200여건입니다. 그것가지고 많으니 적으니 이야기하는데, 그렇게 노동자들의 수가 형편없이 적었고, 일본제국주의가 군림하고 있었던 1931년에도 통계에 의하면 205건이 일어났다고 되어 있습니다. 요즘의 쟁의 수는 결코 많은 것이 아닙셈입니다.
당시에 노동조합운동 노동자들의 투쟁은 대부분 경제투쟁이었습니다. 총칼을 차고 있는 일본제국주의에 직접 맞서는 정치투쟁을 하기 어려웠고, 경제적 상태가 열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경제투쟁의 상대는 자본가들이 대부분 일본사람이었으며 5% 미만의 조선인 자본가들도 대부분 스스로 친일파라고 행사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자본가들에 대한 투쟁이 단순한 사업장내에서의 노자관계, 노사대립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인들의 일본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대립과 투쟁이라는 성격도 한편으로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민족해방운동의 성격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으며, 일본제국주의도 역시 그러한 면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대응을 했습니다. 그리고 워낙에 경제상태가 열악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매우 치열한 투쟁을 벌였습니다.
1923년 서울에서 일어났던 고무공장의 조선인 여성노동자들의 아사동맹과 같은 것은 지금도 생생히 남아 있습니다. 이런 기록들을 보면 당시의 투쟁이 얼마나 치열했던 것인가를 잘 알 수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는 1929년 초의 원산총파업입니다. 일제시대하면 원산총파업 하나만 기억해도 됩니다. 당시에 원산부두의 부두노동자들이 일본 자본가에 대항에 싸운 사건인데 이 싸움은 전국민적인, 마치 복싱 세계 타이들매치를 하면 전국민들이 TV를 보면서 밤새 그 귀추에 관심을 기울이는 식으로 거의 석달여간 진행된 투쟁에 대해 전국민적인 관심이 모아졌고 당시 신문에는 거의 매일 1면에 원산총파업에 관한 보도가 나올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각급 학교, 노조, 사회단체들에서 원산총파업에 참여하는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물품들을 지원하는 보도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원산총파업파업과 같이 민족해방적 성격을 가지고 있던 노동자들을 투쟁은 3.1운동까지는 안된다고 하더라도 거의 3.1운동에 버금가는 일본에 대한 통쾌환 투쟁이었습니다.
그러나 노동조합에 관련돤 책, 노동조합운동에 관련돤 책에는 빠짐없이 나오고 있지만 우니나라 역사책, 학생들의 교과서에 보면 완전히 삭제되어 있습니다.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사회적인 편견때문에 선혈들의 고귀한 투쟁임에도 불구하고 응분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1930년대 이후에는 이 투쟁들의 질이 조금 변합니다. 1930년 들어가면 일본이 우리나라 전역에 철도를 다 놓고 대륙침공의 준비에 박차를 가하던 시절입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산업들이 한반도의 북부지방에 공업시설들이 발달했고, 그곳에서 상당히 치열한 노동자들의 투쟁이 일었습니다. 그러나 1929년 원산총파업 이후에 일본은 사실상 노동조합운동 자체를 불법화시켰기 때문에 대부분의 노동조합운동가들이 지하에 들어가 비합법적인 활동을 했습니다. 그 때 나타났던 것들이 적색노조입니다. 그러나 이 적색노조는 지금과 같은 대중조직은 아닙니다. 그야말로 일본에 대항하는 노동자들의 비밀결사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에 가담할 수 있은 사람들 소수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말은 노조이지만 실제 노동조합운동은 당시에 이미 끝이 난 것이고 주로 비합법인 상태에서 일본제국주의를 전복시키기 위한 활동을 했고, 그것이 국외에서는 무장독립운동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일제하의 노동조합운동은 일본의 조선반도침략과 더불어서 자본주의 발전이 이루어지고 노동자, 노동조합 운동이 새롬게 일어나는 계기는 되었지만 그것이 약 20년 정도 진행되다가 일본의 강압정책에 의해 노동조합 운동이 완전히 소멸하게 되고 지하활동으로 전환하게 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3. 해방정국의 노동조합운동
미 군정청 노동부 발표에 의하면 1946년 11월 30일 현재 노동조합 수가 남한에서만도 1,179개의 노조, 조합원 304, 005명이라고 발표하고 있습니다. 즉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하 전평) 산하의 노동조합 수가 1,111개, 조합원 246,777명이며, 대한독립촉성노동총동맹 산하의 노동조합 수가 68개, 조합원 57, 228명이었습니다. 45년도 해방이 되면서 일제시대의 노동조합 운동의 결과, 결말이 새로운 정세속에 등장하게 됩니다. 제가 전평과 대한노총에 대해 노동조합수와 노동조합원이 몇명이다 인용을 했는데 실제 당시 노동조합운동은 곧 전평을 의미했습니다.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전평은 해방된후 그 어수선한 정국에서 단 4개월만에 노동조합이 1757개가 세워졌고, 한명도 없던 노동조합원이 갑자기 57만명이 생겨나게 된 획기적인 사건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일제시대말기 그 엄혹한 시절에 노동조합 활동을 했던 사람들도 주로 좌익계통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노동조합 운동에 상당한 지식과 경륜을 가지고 있는 편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 의해 아주 계획적이고 치밀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4개월만에 많은 사람들이 조직화될 수 있었습니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 이 4개월동안에는 아무런 방해가 없었습니다. 관의 방해도 없고, 자본가들의 방해도 없었습니다. 자본가라고 해봤자 90%이상이 일본자본가였는데 해방과 더불어 이들이 대부분 일본으로 도망가거나 잡혀서 죽었고, 관이라고 해봤자 미군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군정체제를 잡는데는 2~3개월의 시간이 들었으며 그야말로 공백상태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짧은 시간동안에 급속한 성장이 가능했습니다.
이때 대한노총이라는 것도 만들어졌습니다. 이 대한노총은 당시에는 피비리내는 나는 투쟁의 한편을 담당해었지만 지금으로 보면 그야말로 희화적인 한편의 코메디와 같은 조직입니다.
당시의 좌우대립속에서 노동조합운동은 좌측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부수기 위해서 우익진영에서 서북청년단 같은 반공청년들을 모아서 만든 것이 대한노총입니다. 말은 노동조합, 노동총연맹이라고 했지만 초기 출발은 노동조합과는 전혀 무관한 상태였습니다.
그 당시 김구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백범 김구선생과 동명이인인 그 당시에 청년이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아버지는 당시 용산에 있는 철공장 사장이었습니다. 이 공장도 일본자본가가 도망가고 없는 공장이었고, 김구라는 사람의 아버지도 이 공장의 관리사장으로 들어가 있었습니다. 당시 노동자들은 대부분이 자본가들이 도망가게 되니까 "이 공장은 우리가 운영하겠다". 요즘으로 이야기하는 자주관리 같은 요구들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장은 물러가라"는 요구도 많이 했습니다. 김구라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 회사의 노조원들이 아버지들 물러가라 요구를 가지고 연일 농성을 하자 아버지를 돕기 위해서 노사문제 개입을 했습니다. 개입하고 보니까 노조원들이 전평계열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상담하기 위해 미군정청을 들락 거리다가 노동조합에 관해서 꽤 많이 알게되었습니다. 이사람은 당시에 대한독립촉성동맹이라는 우익단체에 가담하고 있던 우익청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사람이 "전평계열 노조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전혀 다른 노동조합은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노동조합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이사람이 최초로 만든 노동조합이 역사책에 기록되있습니다. 용산역, 서울역 부근에는 수화물을 나르는 우마차 노동자들이 많았는데 '우마차 노동조합'을 김구라는 사람이 만들게 됩니다. 그런식으로 해서 대한노총이 노동자조직으로 행세 하면서 전평과 대결하기 시작합니다.
당시의 전평은 45년에서 48년에 이르는 약 3년간의 걸쳐서 5번에 걸친 총파업을 하게 됩니다. 전평의 총파업은 매우 열악한 경제상태속에서 대중들의 경제적인 요구와 철저히 결합했습니다. 그런만큼 전평이 주도한 파업에는 상당수의 대중이 결합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전평의 상층부는 당시의 남로당의 중앙위원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일상적인 시기에 노동조합운동을 하는 조직이라기 보다는 비록 노동자에 기반하고 있었지만 정권을 잡겠다는 정치투쟁을 시도하는 활동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평의 총파업은 단순히 경제적인 요구를 관철시키는 것에 국한되지 않고, 미군정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는 계획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전평의 총파업은 대단히 폭력적이었습니다. 그것은 비단 전평만이 그런것은 아니었고 양쪽이 모두 그랬습니다. 거의 전투에 가까운 파업이 벌어졌고, 한번 파업이 일어날 때 마다 수없이 많은 사람이 잡혀가고 죽은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전평은 강압적인 미군정에 맞섰으나 그것은 도저히 이겨낼 수는 없었고, 47년 정도에 가면 전평자체가 해산명령을 받게 되었고, 48년 5월 정도되면 전평은 거의 해체됩니다.
당시의 45년에서 48년의 해방정국에서 노동조합운동은 매우 특수한 시기에 특수한 운동의 양상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전평의 해체는 남한에서의 노동조합운동의 주도권을 대한노총이 쥐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4. 1950년대의 노동조합운동
이제 노동조합 운동의 현대로 접어들게 됩니다. 1953년 한국전쟁이후 한국에서는 자본주의 사회가 완전히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부터 노동조합 운동은 일제하, 해방정국의 두번의 단절을 거쳐 새롭게 다시 출발하게 됩니다.
53년 이후 노동조합운동내에서 좌익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소탕되거나 전쟁중 월북한 상태에서 순수한 기층대중만 남아 있는 상태였습니다. 50년대의 노동조합운동사는 사실은 노동자의 투쟁사라기 보다는 그런 것들은 거의 미미한 상태에서 한 예로 여기 예를 들어놓은 조선방직, 지금도 부산 서면에 가면 조방앞이라는 지역이 있는데 전시하인 52년도에 파업투쟁이 벌어졌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옛날에 독립운동 하던 시절에 잡혀서 감옥생활 하던 당시에 간수의 아들이 강일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옛날의 은공을 갚기 위해 강일매라는 사람을 많이 밀어주었습니다. 강일매라는 사람이 기록에 보면 당시 동화백화점 관리사장으로 있을때 횡포가 심해 상당히 유명했던 것 갔습니다. 이 사람을 조선방식 사장으로 취임할 것은 이승만이 직접 지시하자 노조원들이 이를 거부하는 운동을 벌이면서 파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파업은 상당히 길게 갔습니다. 이와 관련된 여러가지 재미난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결국 이 파업도 대한노총이 상당히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이고 대한노총이 노동자들을 기만하면서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당시 대한노총 위원장이 전진한이라는 사람이었는데, 53년도 보궐선거에서 이 사람이 조방쟁의를 노동자들의 요구를 관철 시키기겠다는 공약 딱 한가지만을 가지고 선거에 출마했습니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이사람을 위해 선거운동을 하였고 당선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도 국회의원이 되자 "현실은 현실대로 인정해야 한다"는 태도를 보였고, 결국 강일매 사장의 취임을 인정하는 식으로 노동자를 기만했던 사건도 있었습니다.
대한노총은 전평이라는 대립물이 없는 상태에서 주로 반공의 보루, 반공정신을 함양하고, 반공운동으로 국민의식을 제한 시키는 활동의 전위대의 역활을 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자유당의 노골적인 친위정치세력으로서 자유당의 노동자 지부정도의 역할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6공의 월계수회 정도는 안가겠지만 자유총연맹 보다는 더 큰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각종 이권에 개입을 했고, 부두노동조합에서는 노동자의 임금을 착취하는 일까지 했습니다, 이러한 이들의 활동을 당시에 미국에서 벌어졌던 노동조합운동의 상황하고 매우 유사합니다. 미국에서도 노동조합운동이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성장한 독점자본에 상당한 탄압을 받습니다. 그러나 1930년대 루즈벨트 대통령이 들어선 다음 부터는 진보적인 성향의 정책에 의해 노동조합들도 많이 보호를 받았는데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여러분이 잘아시는 상원의원 메카시에 의한 메카시선풍에 속에서 미국의 노동조합들은 주로 마피아에 의해 장악되게 됩니다. 마피아가 노동조합에 관여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증식시키고, 정치적 지위를 보장 받았습니다. 말안듣는 노동조합을 잠재워주고 그 대가로 다른일로 인한 체포를 모면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제대로 해 보려고 하는 노동조합 위원장들이 마피아에 의해 암살당하는 것은 비일비재했습니다. 시중에 나온 비디오중에 노동조합과 마피아의 관계를 다르는 작품들이 많이 소개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50년대 이런 일들이 더욱더 노골적이고 공공연하게 자행되었습니다.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참 많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한편의 코메디에 지나지 않는 이야기들인데 두가지 정도만 말씁드리겠습니다.
1957년도에 벨기에 브뤼셀에서는 국제자유노련의 세계대회가 열렸습니다. 그때 대한노총에서도 의장단이 파견되었는데 한 만찬에서 국제체신연맹 의장단하고 합석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국제체신연맹에서는 한국에 관심을 가지면서 "한국에도 체신노조가 있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때 한국에서 체신노조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대한노총은 "아, 있다.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여기에 국제체신노조는 한번 방문을 할 의사를 보였고, 대한노총과 방문의 구체적인 날짜 까지 결정했습니다. 이에 대한노총에서는 체신부장관을 만나서 이는 외교적인 문제가 될 수 있으니까 체신노조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체신부 장관 주도로 체신노조가 만들어졌습니다. 지금의 체신노조가 이렇게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지금 여의도에 한국노총 건물이 있습니다. 그게 노총의 가장 큰 자산일 것입니다. 노총이 1975년이 여의도에 이사왔는데 그전에는 소공동에 건물이 있었습니다. 이 소공동 건물이 생기게 된 것에도 재미난 이야기 얽혀 있습니다. 1950년대 노총은 친여적인 조직의 사무실을 쓰고 있었는데 한동안 월세를 안내 쫓겨날 신세가 되었습니다. 당시 노총 사국장에 황인수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꾀를 내어 "국제자유노련 대표단이 한국을 방문한다"는 거짓말을 소문으로 막 퍼뜨린 것입니다. 그리고 포스터를 천장정도 찍어 시내 곳곳에 부착해 놓기도 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노총이 집이 없어서 쫓겨 날 신세가 되었다는 소문도 퍼뜨렸습니다. 하루는 이승만 박사가 대한노총 사람들을 불러 '외국에서 손님이 온다는데 집도 없어서 어떻게 하느냐?"하면서 당시에 다른 관변단체가 쓰는 소공도에 있는 건물을 불하해줍니다. 결국 국제자유노련 사람들은 오지 않았습니다.
이런 일들은 상당히 많았습니다.
결국 내부에서 이권을 둘러싼 권력다툼이 거의 해마다 일어났습니다. 거의 해마다 대의원 대회하면 가처분, 효력정지 등등의 소송이 일어나고 그 내에 파벌이 수 없이 마들어졌고, 그 파벌들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자유당 시대, 제 1공화국의 허구적인 노동조합운동이 이렇게 진행되었습니다.
5. 60년대의 노동조합운동
노동조합운동은 4.19로 인해 일정한 변화를 맞게 되었습니다.
4.19후에 노동자들의 투쟁이 다시금 벌어지고 여러분이 알다시피 교원노조가 만들어지고 새로운 노동조합운동이 진행됩니다. 지방에서는 신문사 노동조합도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4.19 이후의 노동조합 운동은 우리가 상상할정도로 크게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학생들과 시민의 피로 집권한 민주당 정부가 매우 보수적인 정책을 썼기 때문에 5.16이 일어나는 그 전야까지도 교원노조를 인정하지 않았고, 노동자들의 투쟁에도 상당히 배타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자연발생적인 노동자들의 투쟁은 있었지만 그것은 지도할 만한 세력은 거의 없었습니다. 전평은 이미 없어진지 오래고 썪어 빠진 대한노총은 두조각, 세조각 갈라져 내부적으로 싸우고 있었습니다. 결국 4.19 이후로 일정한 발전은 있었으나 그렇게 큰 발전은 없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노동조합운동의 역사에 있어서 보다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5.16입니다, 요즘들어 많이 쓰이는 용어인 '5.16, 박정희와 개발독재' 독재를 하면서도 한편으로 경제개발을 가속화 시켰던 정치상황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개발독재는 정치적으로는 국민의 기본권을 제약하는 정치적 억압으로 나타나고, 경제적으로 급속한 경제발전 특히 수출위주의 산업정책, 수출드라이브 정책으로 경제를 발전시키는 정책을 썼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억압, 경제적으로 노동자들에 대한 저임금정책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 양쪽면으로 문제가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5.16이 일어나면서 군사정권이 제일먼저 했던 일은 노동조합을 전부 해체하는 일이었습니다. 해체하고는 산업별 노조를 만들었습니다. 산업별 노조는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금속하면 기업별로 노조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금속산업의 모든 노조가 하나의 노조가 되는 것입니다. 위원장 한 사람의 명령에 따라 전체 노조가 움직일 수 있는 체제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금속노동조합의 조합원을 다합치면 현재 조직화 되어 있는 것을 보더라도 40만명이 넘습니다. 우리나라의 군인이 60만명 정도 됩니다. 40만명의 대장 정도 되면 국회의원하고도 잘 상대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 움직이거나 한 마디 발언하게 되면 항상 신문에 나게 되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산업별 노조까지는 아니지만 일본노동조합 총연합의 야마기시 위원장이 며칠 전에 발언한 것 , 신당하고 사회당의 연립정부가 구성되려 하니까 사회당내의 좌파를 누르기 위해서 사회당은 이번에 연합정부를 구성하는데 있어서 이러한 원칙을 지켜야 하고 이러한 것을 해서는 안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 사람의 이야기는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 뒤에는 몇 십만의 조합원이 서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산업별노조는 노동조합운동의 역사에 단결이 확대되고 단결의 질이 높아지면서 나타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박정희가 왜 산업별노조를 만들게 되었는가?
산업별 노조는 정상적으로 노동조합운동이 발전한 결과로 만들어지게 되면 대단히 강력한 힘을 가지지만 비정상적으로 발전하게 될때, 그 제일 꼭대기에다가 어용 노조세력을 앉혀 놓았을 때는 노동자들을 통제하는 수단이 되게 됩니다.
산업별 노조가 되면 예를 들어 유통노조들이 단일노조가 되어 한국유통노조가 되고 진로유통은 진로유통지부가 됩니다. 조합비 걷어서 중앙에 올려 보내고 거기서 타 쓰게 됩니다. 예산편성권, 인사권- 조합원들이 지부장을 뽑지만 이 지부장을 견책하거나 징계할 수 있는 권한을 중앙이 가지게 됩니다. 상당히 강력한 권한을 중앙이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올바른 집행부가 나타날 때는 지도부의 강화로 나타나지만 어용귀족이 들어서면 바로 하부에 대한 통제로 나타납니다.
이승만 때만 해도 산업발전의 의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가 들어서면서 산업을 발전 시켜야겠다는 의욕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노동자들을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통제해야겠다는 적극적인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이 결과로 박정희는 노동법 개정을 통해 산업별 노조를 도입하고 우리나라의 노동조합이 산업별 체제로 전환하게 됩니다.
이승만 때는 노동조합이 정치적인 동원 수단 이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 때에는 대한 노총이 정치적인 역활을 할 것이 없었습니다. 다만 경제적인 측면에서 노동자들을 통제하는 역활을 하게 됩니다. 결국 대한 노총은 어용이라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 위세는 많이 떨어지게 됩니다.
박정희정권의 개발독재에 힘입은 자본가들의 노동관계법 개악 시도가 60년대 내내 행해졌습니다. 산업별노조의 해체, 수출산업의 쟁의제한, 각종 수당의 인하, 유급휴일의 축소, 월차, 생리휴가의 폐지, 귀책사유 퇴직자의 퇴직임 폐지, 노동시간연장 등을 요구하는 경제인연합회와 대한상골회의소의 요구가 거의 해마다 제기되었습니다. 결국 3공화국은 두번에 걸친 노동법 개악에 이어 지속적인 수출증대와 외자유치를 위한다는 구실로 1969년 12월 '외국인 투자기업의 노동조합 및 쟁의조정에 관한 임시특례법'을 제정하였습니다.
6. 70년대의 노동조합운동
60년대 중반 이후 저임금과 가혹한 노동통제를 기초로 한 고도성장정책은 노동운동의 새로운 씨앗을 잉태하였으며 7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것은 처절한 모습을 띠고 사회의 전면에 표출되었습니다.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을 제도적으로 개선해 보려던 노력이 벽에 부딪히자 1970년 11월 3일 근로기준법 책을 껴안고 분신 자살한 '전태일사건'이 그것이며, 노동조합 결성을 온갖 수단을 다하여 저지하려던 한 기업주에 의해 저질러진 청부살인사건인 1971년 3월의 '한영섬유 김진수 사건'이 그것이며, 열악한 노동시장에서도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화하지 못해 한계생활 유지조차 어렵게 된 도시빈민들이 일으킨 1971년 8월의 '광주대단지 만여 주민 폭동사건'이 그것입니다.
특히 전태일사건은 사건의 성격에 있어서나 그것이 미친 영향에 있어서 한국노동운동사에 커다란 분기점을 이룬 사건이었습니다. 평화시장의 한 재단사에 의해 행해진 이 사건은 경제개발계획에 따른 한국자본주의의 발전이 낳은모순의 격렬한 표현이었으며 산업의 발전에 따라 노동운동의 중심이 근대공업으로 이동하는 것을 예고한 것이었습다. 동시에 이 사건은 양심적인 지식인, 학생, 종교인들에게 상당한 충격과 각성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으며 노동자의 상태와 노동운동에 대한 관심과 참여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것은 또한 이들에 의해 주도된 반독재운동이 노동운동을 포함하는 사회운동으로 한단계 발전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70년대로 넘어가게 되는데 53년도, 길게보면 48년도 부터 발전한 한국 자본주의가 드디어 2,30년간의 자본주의 발전속에서 새로운 노동조합운동의 씨앗을 잉태해서 발현 시킨 시기입니다. 이시기에 보면 개발독재 정치적으로는 학생 또는 재야 민주세력의 시위가 일어났고 경제적으로는 노동자들의 대항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제어 하는 방법을 양보를 통해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억압적인 조치로 대응했습니다. 그것이 비상사태, 유신, 긴급조치 같은 일련의 강압적인 조치들이 이었습니다.
정치적인 저항으로서 민주화 투쟁이 이었다면 경제적인 부분에서 저항이 이른바 민주노조운동이었습니다. 민주노조운동은 우리나라 노동조합운동에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과거의 노동조합운동이 상당히 대중들의 자연발생적인 투쟁 또는 대한노총의 활동이 노동조합운동의 내용의 대부분이 었습니다. 그런데 민주노조운동은 대한노총과 무관한 그리고 과거의 부두, 건설과 같은 분야가 아니라 근대공업 분야, 주로 경공업과 같은 수출 분야 , 전자, 섬유와 같은 분야에서 여성노동자들에 의해서노총과 전혀 무관하게 그러나 매우 조직적으로 노동조합이라는 조직을 만들고 그를 통해 쟁의를 시도하는 양상을 띠었습니다. 또한 그 이전과 달리 도시산업선교회, 카톨릭노동청년회 등등의 종교계, 양심적인 지식인, 교수의 지원속에서 노동조합운동이 새롭게 일어났습니다.
그런 것들이 과거에 유명했던 동일방직, 원풍모방, 콘트롤데이터 같은 사건으로 외화되었던 것입니다. 당시에 이런 운동 과정속에서 여러 선진적인 노동자들이 출현하게 되고 노동조합운동이 육체노동이라는 아주 좁은 틀에서 사회운동으로 성장하게 되는 교감, 의사소통이 아주 폭넓게 이루어졌습니다.
지금도 대일화학 노동자들의 투쟁은 단행본 책으로 나와 있습니다. 아무리 마음이 메마른 사람일지라도 그 책을 보면 책에 눈물을 적시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기록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는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70년대 중반의 일입니다.
남양나이론, 원풍, 소위말하는 대기업들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노총은 당연히 주도권을 빼앗기게 됩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정치적으로 노총이 이미 쓸모가 없는 조직이 되어 버렸습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을 막는 역활을 했던 노총은 노동자들의 투쟁이 미미했던 60년대에는 별로 이런 일을 못했지만 노동자의 투쟁이 일어나니까 노총은 당연히 자기 할일을 찿았고 이때 노총은 경찰보다 더했습니다.
단위노조에서 쟁의행위가 일어나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쟁의행위를 중단시키려했고 말을 듣지 않으면, 위원장을 제명했고, 그 유명한 동일방직의 '똥물 사건'- 파업하는 여성 노동자들에게 화장실에서 오물을 퍼다가 뿌린 사건들도 사실 노총이 관여를 했습니다.
정치적인 저항, 경제적인 저항이 가속화 되면서 YH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10.26이 일어나 박정희는 암살되게 됩니다. 박정희의 암살은 김재규에 의해 우연적인 사건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사실은 박정희의 죽음은 역사에 있어서의 하나의 필연입니다. 미국의 입장에서 보아도 그렇고 한국 자본가들, 경제인 입장에서 보아도 그렇고, 일반 서민입장서 보아도 그렇고 박정희라는 인물은 정치적 시효가 이미 지난 인물이었습니다. 더이상 박정희 같은 사람으로는 지도력을 행사하기 힘든 상황이었고 결국 이 사람은 불행한 최후를 맞게 된 것입니다.
7. 87전야의 노동조합운동
그러면서 당시에 80년 봄이 도래하는데 박정희가 죽은후 정권을 누가가질 것인가를 놓고 3김씨가 대립하고, 정치군부가 기회를 엿보는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일시적인 공백이 생겼는데 당시에 노동조합운동이 꽤 활발했습니다. 이때 매우 의미있는 일들이 벌어지게 됩니다. 70년대에는 섬유, 전자등의 산업에서 주로 여성노동자들이 노동조합운동을 주도해왔습니다. 그런데 이때는 70년대의 민주노조운동의 중심을 이루었던 부분에서 파업이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파업이 일어났던 곳은 대우조선, 인천제철, 한일공업, 부산 파이프, 창원공단의 방위산업체 같이 주로 중화학,금속, 큰 공장의 장년노동자에 의한 투쟁이 몇달동안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런 투쟁도 5.18로 인해 종말을 보게됩니다. 제가 아까 자본주의 발전과정이 노동조합운동의 역사에 영향을 미친다고 했는데, 자본주의 발전과정에 따라 노동자 내부의 구성의 변화, 핵심계층의 변화, 주도세력의 변화가 발생하게 됩니다. 80년대 들어와서는 한국자본주의를 어깨에 지고 있는 중화학 공업, 독점대기업의 노동자들에 의해서 노동조합운동이 일어나게 되고 87년 이후 현실화되고 요즘 우리 매일 신문에서 보고 있는 울산사태의 주역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5.18이후 전두환은 양칼을 휘두릅니다. 한 칼로는 민주노조운동을 날려보냈습니다, 민주노조운동의 지도자들이 삼청교육대에 보내졌습니다. 여성노동조합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삼청교육대로 끌려갔습니다. 다른 한 칼로는 지탄받던 대표적인 어용 간부 몇명을 그만두게 하였습니다.
노동조합법도 개정이 되어 이제는 기업별체제로 바꾸어었습니다. 왜 바꾸었는가? 박정희는 기업별에서 산업별로 바꾸었는데 민주노조운동이 발전해서 이 산업별 노조를 먹어버릴 가능성이 생겨서 이 위험성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기업볍로 노동조합 체계를 바꾸었습니다.
80년대의 가장 큰 특징중에 하나는 위장취업자- 노동조합운동을 하기 위해서 노동자가 아닌 사람이 의식적으로 노동현장에 들어가서 노동조합운동에 깊게 관여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외국에는 상급노동조합에서 예컨데 언론연맹에서 SBS에 사람이 없으니까 거기에 취직을 시키고 노조 조직사업을 합니다. 그리고 KBS에서도 관여를 해서 노동조합을 만듭니다. 외국에서는 이런일을 상급연맹에서 하는데 이는 합법적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옛날에 화학노조 같이 상대적으로 민주적인 부분에서 시도했던 적이 있습니다. 80년대 들어와서는 광주사태에 절망한 학생운동 출신들을 중심으로 한해에 1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노동현장에 들어가는 세계노동조합운동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이들이 사회적 경험이 없고 어린나이에 관념적인 상태에서 범한 실수가 많았다고 볼 수 있으나, 이미 노동조합운동 자체가 상당히 과학화될 것을 요구 받는 상태에서 이들은 노동조합운동의 과학화와 선진노동자 배출에 많은 기여를 하였습니다.
저는 87년 현대 노동조합운동이 크게 터졌지만 그 이전 부터 현대에 있는 분들이 소모임을 하고 학습을 했던 것을 많이 경험한 바 있습니다. 그것은 외부에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지만 여기저기서 그런일들을 수 없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의 보다 노골화된 탄압에 맞서 양심적인 지식인, 직장인내에서 군부독재에 대한 반감이 높아가면서 생황주변에서 부터 새로운 사회운동을 벌이려는 욕구들이 높아갔습니다.
이 대단한 역사 70-80년에 걸친 긴 역사을 짧은 시간에 이야기 하다보니 불충분한 부분이 많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몇마디로 정리하자면 우리나라의 노동조합운동의 역사는
단절의 역사이었습니다. 특히 정치권력의 문제로 인해 일제, 해방등과 같은 단절의 역사이었습니다. 그러나 53년 이후의 운동을 단절에서도 운동은 계속 커왔습니다. 단절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노동조합운동을 계속 질적 양적 성장을 해왔습니다. 동시에 이러한 과정에서 과거에 노동조통제기구로서의 역활을 했던 어용노총은 사회의 발전 경제의 발전에 따라 자신의 역활과 지위가 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준권력기관, 반공의 보루에서 점차 경제적인 문제와 관련된 노동통제기구, 노동자억압기관으로 변하고 지금은 억압했다는가는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나기 때문에 억압도 못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제 노총은 정치적 관심도 별로 얻지 못하게 되엇습니다. 이 이야기를 거꾸로 하면 노동조합운동의 주도권이 전혀 새로운 곳에서 대중에 기반해서 점점 커나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변화는 제도적으로 보장 받는 것도 아니고 조직적으로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만 70-80년에 걸친 노조운동동의 역사에서 올바른 방향으로 진전을 이루낸 것이라 정리를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노동조합운동사 II
1. 87년 7,8월 대파업 투쟁과 노동조합운동의 새로운 출발
2. 30개월간의 고양기
3. 90년 이후의 침체기
한국 노동조합운동사 2
지난번에는 한 시간동안 70년 기간동안 일어난 노동조합운동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그에 이어 87년 이후의 약 6년동안의 시기를 다루고자 합니다. 거의 10배가 넘는 시간의 차이가 남에도 불구하고 87년 이후 6년간 노동조합운동과 관련해서 한국에서 벌어졌던 일들은 그 이전의 70년동안 벌어졌던 일들을 능가하는 큰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1. 7,8월 대파업투쟁과 노동조합운동의 새로운 출발
징과 꽹가리 소리는 마치 진군나팔과도 같았다. 뒤따르는 오토바이와 자전거 부대들은 기계화 부대처럼 보였다. 그리고 사람을 가득 싣고 대형을 이루며 행진하는 포크리프터와 트럭들은 장갑차와 탱크가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일으키게 했다. (조선일보, 1987년 8월 22일)
조선일보 1987년 8월 22일자 사설에서 따온 몇개의 문장을 인용했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 8월달에 일어났던, 울산 지역의 현대계열사 노조원들이 사업장끼리의 연대투쟁을 넘어서서 시청으로 항의 방문하는 대열을 그린 것이입니다. 울산 방화진쪽에서 시청까지 10km가 넘는 거리를 마치 여의도에서 국군의 날에 군인들이 퍼레이드 하는 것처럼 행진한던 것을 기득권의 눈으로 이것이 자신의 이해를 심각히 위협하는 병사들의 행진처럼 바라보는 것을 그리고 있습니다. 실제 7~8월 투쟁은 우리 사회의 각 계층에게 우리의 역사속에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어떤 노동조합운동도 7~8월 대파업투쟁과 무관한 것이 없습니다.
(1) 7,8월 대파업투쟁의 양상
7~8월 대파업투쟁을 표면적인 양상을 보면 몇가지 중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그 짧은 기간에 노동조합의 파업이 집중적으로 벌어진 것이고 동시에 노동조합이 집중적으로 1,300여개가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사실 세계적으로 볼때 80년대 이후로 노동조합운동은 서구라파를 포함해서 하향추세를 걷고 있습니다. 노동자의 근 50% 이상이 조합원으로 조직되어 있다는 스웨덴에서도 노동조합의 조직율이 조금씩 떨어져가는 추세에 있습니다. 미국 같은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영국이나 독일 , 프랑스등과 같이 노동조합운동의 선진국이라는 나라에서도 노동조합이 상당히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노동조랍의 힘이 점차 약회되면서 몇개의 노동조합이 노선을 대폭양보하면서 노동조합총연맹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바로 그러한 노동조합운동의 하향 추세속에서 매우 이례적으로 한국에서, 제 짧은 소견으로도 세계노동조합운동사에서 석달동안 파업이 3천건 넘게 일어나고 노동조합이 1,3000개나 만들어진 예는 없었습니다. 거의 역사속에서 전무후무한 대폭발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쟁의가 많이 벌어지고 노동조합이 많이 만들어졌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그것에 참가한 구성이 대단히 다양하고 실제 현존하는 노동자들이 거의 다 포함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제조업 노동자들 금속, 화학, 섬유로 부터 시작해서 아주 조그만한 양복점, 중국집 노동자들로 부터 거대한 기업의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7~8월 투쟁의 열기속에서 파업을 하고 노동조합을 만든 양상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적인 양상이었습니다.
(2) 7~8월 대파업 투쟁의 원인
7~8월 대투쟁을 가져온 원인은 무엇인가? 우리가 간단하게 노동자들이 오랫동안 불만을 참고 참아온 결과라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진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저임금, 장시간노동, 산업재해등 열악한 근로조건과 생활조건이 이러한 대폭발을 만들어 내게 된 배경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우리나라 같이 자본주의가 일정하게 발전한 다른 나라에서는 에를 볼 수 없는 전근대적인 노동통제속에서 불만이 누적되어온 것이 내적인 중요한 원인입니다. 실제로 이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나라가 연 10%에 달하는 경제성장을 유지하고 있는데 대해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 중국이 앞으로 그렇게 될지는 모르지만 아직까지 다른 나라에서는 2-3%의 경제성장만 이루어도 호황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평균 10%, 많을 때는 15%. 적을 때는 7~8%을 20년씩이나 유지하고 있는 배경에는 세계적으로 유래없는 억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제성장을 냉정하게 보면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그만큼 권력과 자본가들이 마음대로 노동력을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처럼 노동조합의 힘이 강하고 단결해 있었다면 이와 같은 일방적인 억압에 의한 고도의 성장은 어려웠을 것이라게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의 평가인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70년대 보다는 80년대가 임금 높지않았는가라고 설명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80년대 전두환 정권하에서는 노동자들에 대한 수탈의 정도는 더욱 더 심해졌습니다. 지속적인 불만의 누적은 언제가 폭발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회가 왔는데 그 기회는 우리나라에서는 특이하게 약 30년동안 지배를 해왔던 군사독재 정권이 87년의 6월항쟁에 의해서 후퇴하게 되는 양상을 보임에 따라 그 빈공간에 노동자들이 자연스럽게 진출하게 된 것입니다. 이 외적요인 즉 군사정권이 6.29 선언을 통한 양보와 후퇴가 내적요인보다는 보다 중요하게 작용했습니다.
(3) 결과- 노동조합운동의 새로운 발전단계
7~8월 투쟁은 몇가지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앞에서 살펴본것이 표면적인 묘사라면 지금 이야기드리는 것은 7~8월 투쟁의 내용, 본질과 관련된 것입니다.
7~8월 투쟁은 몇가지 중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그 첫번째는 노동조합운동이 정상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한국의 노동조합운동은 48년이후 본격적으로는 53년이후에 말이 노동조합이지 실제는 노동자들을 통제하기 위한 허구적인 노동조합운동과 그에 대항하는 개별노동자, 개별노동조합들의 아주 자생적인 저항이 노동조합운동사를 이루어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른바 계획과 조직을 가지고 움직이는 운동이라는 의미에서 본다면 사실상 운동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노동조합의 가장 중요한 성격인 대중조직인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 대중조직이 대중성을 잃을 때, 4,800명이 일하고 있는 직장에서 48명이 대중조직으로 조직되어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중조직이라고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과거의 노동조합운동은 대중운동으로서의 노동조합운동을 펼쳐내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결국 존재한 것은 정권의 하부기관과 다름없는 허구적인 노동조합 조직이 있었고, 민주노조 세력은 미미하게 존재했습니다. 그래서 폭 넓은 대중이 참가하는 대중운동으로서의 노동조합운동은 87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87년 7~8월 대파업 투쟁을 통해서 진정으로 대중들의 전면적인 참여에 의한 대중운동이 비로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이러한 수많은 대중들이 노동조합이라는 조직을 중심으로 결집을 했습니다. 그 이전에 조합들을 보면 이미 만들어진 조합들을 회사와 연관을 맺고서 조합원들을 위한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조합 간부들은 노총과 연계를 맺고서 그 어려웠던 시절에 노동조합 간부들은 해외에 많이 나갔습니다. 1년에 백명이상씩 나갔습니다. 그에 필요한 경비는 해외에서 나왔습니다. 대개보면 ICFTU 같은 국제조직들이 상당한 자금을 지원했습니다. 위원장들은 사교모임 같은 것에 열중했고 조합은 거의 일을 안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노동조합은 거의 의미없는 상태에서 존재했습니다. 그때 제대로 싸우려다 보니까 노동조합이 필요해서 조홥을 만들려고 했던 사람들은 마치 간첩들이 지하조직을 만드는 것럼 움직였습니다. 사전에 결성식 하기 전에 조금이라도 소문이 나면 그것은 100% 실패했습니다. 당시에 노동상담소 같은데서도 주로 전수하는 기술이라는게 주로 회사 몰래 어떻게 비밀스럽게 조합을 만드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실제로 노동조합이 법으로 보면 허용되어 있지만 사실은 회사내에서 부터 그것을 만드는 것 자체가 엄청난 억압아래 놓여 있었고, 겨우 만들어서 신고서를 가지고 시청에 신고하러가면 벌써 회사측으로 부터 연락을 받은 시청직원이 이것 저것 트집을 잡아 신고서를 반려합니다. 다시 서류를 내려고 준비하면 회사에서 위원장을 비롯한 몇명을 해고시킵니다. 이렇게 되면 종업원이 아닌자가 조합원이 되어있다 해서 반려를 합니다. 설사 이렇게 해서 조합을 만들었다 해도 며칠 못갑니다. 노동조합이 사실상 불허 되어 있는 상태에서 노동조합을 만든다는 것은 대단한 결심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87년에는 모든 것이 법을 넘어서 버렸습니다. 불법파업이란 이야기 하는데 87년 당시에 합법적인 파업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실제 쟁의조정법에 의거한 파업은 없습니다. 그리고 노동조합을 만들때도 보면 정상적으로 만들어진 노동조합은 없습니다. 다 법을 무시하고 파업을 했고 노동조합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수가 엄청나게 많아서 정부에서 이것을 인정하는 식으로 법을 고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87년 9월달 정기국회에서 법을 고치게 됩니다. 그 법의 개정내용중 중요한 것은 복수노조문제라거나 3자개입 금지 같은 중요한 사항은 양보하지 않았지만 이미 정권 자체가 생각을 달리먹었습니다. 과거에는 노동조합 없는 노동정책을 유지해왔다면 이미 수 많은 사람이 노동조합법에 의거해 조합을 만들고 활동을 하는 현실을 인정하는 선으로 물러났습니다. 노동조합도 단순히 신고만함으로써 설립이 가능하게 되었고, 노동조합의 임원 자격이나 여러가지면에서 자유로운 활동이 가능하도록 개정을 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7~8월 투쟁의 성과이면서 그것의 가장 중요한 성격을 이루고 있습니다.
노동조합이 드디어 40년만에 노동자들의 보편적인 대중조직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래서 7~8월 투쟁 이후에는 웬만한 곳에서는 자신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노동조합을 만들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예외적인 일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컨데 삼성그룹이라거나 중소기업 같은 데서 노동조합에 대해서는 완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곳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보면 노동자들의 힘에 의해 노동조합이 합법화되고 노동자들의 단결의 구심으로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특징으로서는 조금 세부적으로 보자면 과거에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이 수출산업의 여성 경공업 노동자들이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80년대 들어서면서 부터 한국자본주의, 예전에 김우중씨 같은 경우 몇십원짜리 와이셔츠를 만들며 일어섰습니다. 현대 같은 경우 예외이지만 대부분의 섬유를 바탕으로 해서 일어섰습니다. 그런데 월남전에서 일정한 자본축적을 이룩한 기업가들에 의해서 그리고 한국자본주의가 세계시장에서 경공업분야의 경쟁력을 상실해감에 따라서 80년대 중화학금속공업이 대단히 발전을 했으며, 이에 따라 사람들의 생활이 급격히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70년대 후반부터 대규모의 중화학공장들이 많이 생겼고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우리나라의 노동자만을 놓고 볼때 그 노동자내에서 중화학 금속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핵심적인 계층으로 부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80년대 초부터 뚜렷히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실제 노동조합운동은 여전히 중화학금속 노동자들이 전면에 나서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7~8월 투쟁으로 인해 모든 것이 완전히 정상화 되면서 이들이 운동에 있어서 핵심적인 계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7~8월 투쟁의 기폭제, 가장 먼저 노동조합을 만들고 파업을 벌인곳이 어딘가하면 바로 현대엔진입니다. 현재 현대중공업으로 통합이 되어있고 여러분이 잘아시는 권용목씨가 지도자로 이 투쟁을 이끌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7월 2일인가에 투쟁을 벌였는데 사실상 그 이전부터 준비를 해오다가 6.29선언이 나고 정세가 달라지면서 치고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도하선이 되서 가장 늦게 올라온 것이 서울입니다. 올라오게된 과정을 보면 실제 여기 서술된 것과 같습니다. 울산에서 현대엔진이 싸우고 그 옆에 현대중공업이 싸우는 식으로 지역에서 번집니다. 그러면 다른데 있는 현대계열에서 싸우고 그 뒤 현대자동차가 싸우면 기아자동차가 싸우고 중공업 하면 현대중공업, 대우중공업, 삼성중공업으로 번져 나갑니다. 주로 보면 대기업, 중화학 공업을 중심으로 싸워나가고 한지역에서 한 곳이 싸우면 그게 지역 전체, 전국적으로 번져나갑니다. 이과정에서 중화학, 금속 공업의 노동자들이 핵심 계층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저는 이 지적을 자주하는 편입니다. 실제 노동자라고 해서 다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노동조합이 발전하려면 단결력, 조직력 같은 다양한 조건을 필요로 합니다. 대기업 노동자들을 보면 거의 군대이상입니다. 대기업 내에서의 노동과정과 노동통제는 군대이상으로 조직화되어 있고 매우 합리적으로 편재가 되어 있습니다. 이런곳에서 10년이상 근무한 사람을 보면 매우 단련이 잘되어 있습니다. 사실 학력 같은 것도 문제가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학력이 가장 낮은 곳이 중국집 노동자입니다. 대개 국졸이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전과자, 수배자들이 많습니다. 중화학 금속 노동자들을 보면 뽑을때 부터 공고출신을 뽑았고 이 사람들이 나름의 포부를 가지고 주변의 기대속에 공장에 들어가면 완전히 기름투성이, 흙투성이속에서 커온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대개 공장에 들어가면 재교육을 받습니다. 또 기능자격을 따기위한 별도의 교육도 받습니다. 이런데서 커나온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사회 생활능력 조직생활능력이 배양되거 온 사람들입니다. 공장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대개 30년 초반, 중반의 기혼남성들이 핵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면 제철회사 같은데 보면 워낙에 힘든일이기 때문에 나이가 40대~50대 입니다. 그러나 생활이 불안정한 20대도 아니고 어느정도 생활이 안정적이고 자기의 인생을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또한 대규모 노동과정속에서 조직적으로 단련된 사람들이 가장 많이 편재해 있고 공장규모가 크기 때문에 노동조합의 힘이 클 수 밖에 없는 곳이 바로 금속 대기업 노동조합입니다.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대개 이런 사람들이 제조업 노동조합 운동내에서는 가장 핵심적인 계층으로 서 있습니다. 독일에서도 금속노동조합 위원장 하면 준수상급의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드디어 이런 금속노동조합들, 중화학 부문의 노동조합들이 노동조합운동의 전면에 등장하는 것이 7~8월 투쟁으로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그전에 없었던 곳에서 노동조합운동이 발전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비제조업분야- 언론사, 병원 제2금융권, 백화점 이외에도 여러가지 많습니다. 사무전문직, 판매서비스직 분야에서의 노동조합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졌고 그들이 노동조합운동의 기본대오로 합류했다는 것입니다. 실제 자본주의 발전과정에 사무전문직과 판매서비스직의 수는 게속 늘어갑니다. 최근의 통계를 보더라도 노동자들내에 직업별 분류에 의하면 사무전문직, 판매서비스직의 증가율이 월등히 높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노동자들이 이 방면에서 증가해음에도 불구하고 이 방면의 노동조합운동이 전무했다는 것은 전체적인 노동조합운동의 취약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아시겠지만 특히 이런 분야의 사회적인 영향력은 제조업분야와는 많이 다릅니다. 영향력의 크기만이 아니라 영향력의 내용에 있어서도 독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런 분야에서의 노동조합운동이 활발히 일어난다는 것은 전체 노동조합운동의 질적변화와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7~8월 투쟁을 통해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노동운동만 가지고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한국의 현대사 전반을 가지고 설명할 수 밖에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요인은 70년대 이래 날로 심해지는 군사독재에 맞서는 국민적인 저항의식의 확대가 큰 작용을 합니다. 특히 사무전문직 같은 경우 대개 대학 출신이 많습니다. 이 대학출신자들이 대학을 다녔던 시절이 60년대가 아닌 70년대 80년대 이었을 경우에 청년시절의 사회의식은 행동으로 표현되지 않았을지라도 직장생활 같은데서 여전히 근간을 이루게됩니다. 이것이 직장속에서의 올바른 사회활동으로서의 노동조합운동으로 나가게 됩니다. 따라서 이것은 단순히 근로시간, 임금에 기초한 폭좁은 노동조합운동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 역시도 한국의 현대사가 만들어낸 하나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4) 의의 - 한국 노동조합운동의 완전 정상화
지금까지 말씀드렸던 것들이 7~8월 투쟁의 산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한국의 노동조합운동이 완전히 정상화되었다는 것에 가장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30개월간의 고양기
그후 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 6년이라는 세월을 크게 두게로 나눌 수 있습니다. 89년 말까지를 하나의 분기점으로 하여 그 앞선 시기를 고양기라고 하고 그 뒤시기를 침체기라고 합니다. 조수에 간만의 차이가 있듯이 대중운동도 급격히 고양하는 시기가 있고 침체하는 시기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고양기에서 바로 침체기로 가고 침체기에서 바로 고양기로 가는 것으로 설명하기는 힘듭니다. 노동자들 대부분이 조직화되어 있고 계획에 의해 투쟁을 하기도 하고 안하기도 하는 것은 고양이나 퇴조라고 하지 않습니다. 고양이다 퇴조다하는 것은 노동조합운동이 그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발성에 의존하는 단계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막 일어서면 고양기이고 썰물처럼 막 빠지면 퇴조기가 되는 것입니다. 7~8월 투쟁이 누구의 지시에 의해서 계획에 의해서 이루진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30개월도 마찬가지 입니다. 89년 이전의 시기를 고양기라 부르고 그 이후를 침체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 과연 이 침체기뒤에 고양기가 올 것인가? 저는 온다고 하더라도 과거와 같은 그런 고양기는 오지 않을 것이다고 봅니다. 예컨데 지속적으로 89년 이후에는 임금을 까먹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이 87년에서 89년까지는 예전에 못 올린 것을 보상이라도 하듯이 평균 20%이상씩 임금인상을 했습니다. 그러나 90년 부터 시작해서는 사실상 물가인상이나 하는 것을 생각하면 많이 까먹고 있습니다. 옛날로 바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겠죠. 마치 톱날 처럼 완전히 후퇴하지는 않지만 약간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는 건데. 앞으로 불황이 지속되고 물가가 오르는 현재의 상태의 지속에서는 다시 '잡아갈래면 잡아가라 도저히 못살겠다' 하면서 터져 나올 수 있겠지만 87년과 같은 것이 반복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의 운동상태는 그런 자생성에 의존하는 단계는 완전히 극복되지는 않았지만 조금씩 조금씩 극복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노동조합 전국적으로 활동하는 그런 자생적인 요소와 의식적인 요소가 반반정도 존재하는 상황에서 고양기가 나올 것이고 그때는 아마도 87년 처럼 임금인상과 노동조합 건설만을 외치는 싸움이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인 지위를 획기적으로 높여낼 수 있는 그래서 한번 그렇게 싸우면 법정도는 새로 만들던가 완전히 고칠 수 있는 위력을 보이는 고양기가 예견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고양기를 보면 교안에도 나와 있지만 7~8월 투쟁 보다는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그 유래를 찿기 힘든 대단한 파업과 노동조합 건설이 있었습니다. 이런속에서 생산직 노동조합들은 주로 지역별로 보였고 업종 사무전문직에서는 업종별로 연대를 했습니다.
(1) 조직운동의 발전
고양기에서는 다른 여러가지를 이야기 할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전반적으로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에 대해서는 완전히 익숙해져서 노동조합이라는 이 무기를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이해와 처지에 맞게끔 훈련이 되가는 시기입니다. 그리고 이 속에서 노동조합의 지도자가 만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실제 아무리 작은 조합에 가도 위원장과 간부들이 있습니다. 노동자들이 없던 시절에는 노동자들이 어떤식으로 살았는가? 특히 제조업 노동자들은 일하고 저녁에 술먹고 낚시가거나 구체적인 예를 들어서 죄송하지만 00000 같은데는 40대 50대 이런분들이 있는데 한번 춤이 유행이다 하면 다들 춤추러 갑니다, 그리고 포커가 유행이 하면 매일 포카만 칩니다. 그것 이외에는 별다른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지금도 여전히 그런 부분은 남아 있지만 노동조합운동이라는 새로운 일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여하게 됩니다. 이속에서 많은 훈련이 이루어집니다. 지금은 모여서 회의하고 공부하고 투쟁하고 평가하는 대단한 사회활동이 일어 납니다. 실제로 한국에서 관료조직을 제외하고 자발적인 조직중에서 노동조합만큼 이렇게 열심히 돌아가는 데는 없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문제는 아닙니다. 우리나라에 약 200만명이 조직되어 있다면 그 200만명이 매일 이렇게 움직이고 있다면 이것은 우리나라의 역사의 발전을 앞당길 수 있는 대단한 자양분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속에서 지도자들이 커나가고 있는 것이고 바로 이속에서 다른 나라처럼 대통령도 나오고 국회의원도 다수 나오게 될 것입니다. 한국역사의 미래는 바로 여기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87년이 고양기속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져왔습니다.
(2) 전국조직의 탄생
또 하나는 대단히 중요한 것인데 노동조합의 단결이 이루어져 나가고 있습니다. 이 단결이 몇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제조업 노동자들은 한쪽에서 경찰이 들어오면 그 옆 공장에서 가서 도와줍니다. 이게 현대계열이건 대우게열이건 상관이 없습니다. 일단 아쉬운데로 지역별로 모이게 됩니다.
그러나 사무직은 다릅니다. 사무전문직은 현대화재보험이 있는데 옆에 신한은행이 있다. 그러나 아무래도 인천에 있는 현대화재보험이 더 가깝거든요. 제조업은 지역별로 모이는 반면에 사무직은 업종별로 모이게 되었습니다. 이는 대단히 자연스러운 결과인데 이것이 큰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제조업은 조금 잘 싸우는데가 모이고 약한데는 여기 못들어오게 됩니다. 왜냐하면 여기들어오면 탄압을 받으니까 그러다 보니 다수가 보이지 못하고 한 지역에서 소수가 모입니다. 그래서 전투성을 강조하게됩니다, 이게 지역노조협의회, 서노협. 인노협. 마창노련 같은 것들입니다. 그 다음에 업종 같은 경우 거의 비슷한 것끼리 모입니다. 보험끼리 모이고, 언론사끼리 모이고, 연구소끼리 모입니다. 이렇게 모이다보니까 탄압도 적게 받고 공동으로 적용되는 일들이 많기 때문에 할 일이 많습니다. 대부분 업종의 특성에 따른 조합내부의 공동의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됩니다. 한쪽에서는 대중성 중심으로 할동을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전투성 중심으로 나가게 됩니다. 물론 이것은 다른 한측면에서 활동가 이런 부분들이 제조업쪽에서는 오랜 부분 축적이 되어왔지만 비제조업쪽에서는 갓 시작했기 때문에 그 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것도 작용을 했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두개의 길로 걸어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외부에서 보면 한쪽은 조금더 잘싸우고 다른 한쪽은 그렇지 못한 것처럼 보이고 다른면에서 보면 한쪽은 조직력이 위태롭고 다른 한쪽은 그 분야를 완전히 장악해 들어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업종회의에 들어와 있는 연맹들 같은 경우 합법적인 연맹 자격을 얻는 방향으로 나가는 추세에 있습니다. 업종 같은 경우는 내부의 질이 문제이지 조직외향에 있어서는 대단히 완성된 형태로 가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면 복수노조금지조항만 개정이 되면 그 무엇이든 같다 붙이기만 하면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조업쪽은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지역별로 모인다는 것은 노동조합 이론에 의하면 별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노동조합의 가장 기본적인 근로조건에 관해 협상할때 인천지역의 노동자들 다 모였으니까 인천지역의 자본가들 다 모여서 협상하자는 것은 성립이 안됩니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소산업이든, 대산업이든 산업별로 모여야 합니다. 물론 산업별로 묶여도 지역별 단결은 중요하며 따라서 지역협의회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업별로 되어있는 노동조합의 형태를 산업별로 재편하고 이를 근간으로 지역별 협의회를 만들어가려고 합니다.
산업별로 묶어 내기 위해서는 대단히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지역노동협의회가 전국적으로 모여 전노협이 되고, 업종의 각 연맹이 모여 업종회의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처음에는 하나의 그릇에 담으려는 노력이 있었으나 상호간의 차이 때문에 전노협과 업종회의로 나눠지게 되었습니다.
3. 90년 이후의 침체기
(1) 침체기의 양상과 원인
그 이후에 침체기로 이어지는데 다른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중요한 것은 몇년간에 걸친 임금인상과 근로조건의 개선 그리고 무엇보다도 노동조합을 합법적으로 운영해나갈 수 있다는 조건의 변화로 인해서 폭발적인 의지가 굉장히 떨어지게 됩니다. 이것을 단순히 탄압만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탄압은 실제 89년 공안정국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89년에 노동조합이 건설되는 수와 쟁의발생건수는 88년과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탄압도 중요한 요인이나 가장 큰 요인은 자발성이 떨어지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이제는 대개 봄에는 조합원들이 과거처럼 열기를 투쟁에 참여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사업장마다 차이는 있지만 전반적인 추세입니다. 이러한 침체기는 노동조합운동의 긴 역사에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또 자주 찿아올 수 있는 일입니다. 이런 정세속에서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대응에 대해서 저는 활동과 조직 양면에서 이제까지의 대응이 문제가 있었고 여전히 제대로 대응하지 않을때 앞날이 그렇게 밝은 것 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2) 노동조합운동의 현 주소
활동의 측면에서 볼떄 초기에 우리가 싸울때는 임금인상과 노동조합 건설을 가지고 싸웠습니다. 이 노동조합운동의 가장 큰 약점은 한쪽면만 강조한는 본질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노동조합은 더 많이 생산하자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야기하는 조직도 아닙니다. 주로 더 많이 달라 고루 달라는 분배와 관련된 조직입니다. 실제 이 사회속에서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은 보다 큰 빵을 만들자, 보다 고르게 분배하자는 두가지입니다. 생산력을 높이는 것과 생산관계를 평등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 문제중 어느 한편만을 강조하는 것은 사회적 설득력을 크게 못갖습니다. 사회주의가 왜 실패했는가? 거기는 마치 골고루나누는 것 처럼 보였지만 생산력을 높이는데, 보다 큰 빵을 만드는데 실패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주의하면 자본주의 보다는 못사는 제도라고 일반대중들은 알고 있습니다. 노동조합은 경제가 어려운데 자꾸 나눠가지는 이야기를 한다. 직업이기주의라는 말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사실은 노동운동의 고질적인 취약점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극복해낼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합니다. 노동조합이 단순히 임금만 더 받을려고 하는 운동이 아니라는 것, 그것도 중요한 요소로 포함이 되지만 그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이 사회에 설득을 시켜내야 합니다. 제일 첫 강의 노동조합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말씀을 드렸지만 점차 노동조합의 역할은 발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노동조합법에도 나와 있듯이 노동자들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향상의 역할을 노동조합이 해야 합니다. 사회적 지위라는 것은 다시 나누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정치적 지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노동자의 정치적 지위를 높이는 것은 단순히 몇 사람의 정치적 지위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인구의 반이 높는 노동자와 가족들의 지위를 높이는 것이고 그것은 그 옆에 있는 농민, 빈민 다 해당되는 것입니다. 노동조합의 노동자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하기 위한 노력이라는 것은 결국 이 사회의 민주화라거나 이 사회의 보다 진보된 구조로의 개혁을 다 포함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의 열기를 모아내기 위해서는 물론이거니와 이 사회에서 노동조합의 지위를 인정을 받고 설득력을 갖게 하기 위해서라도 활동을 폭을 넓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얼마전에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이 그랬지만 파업을 하다가 욕을 먹을까봐 하루는 파업을 공장에서 안하고 일산해수욕장에 쓰레기 주으러 나간다거나 하는 것도 괜찮은 일이지만, 하루 이러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울산에서 쓰레기 소각장 문제가 주민들에게 큰 피해를 주고 있는데 그럼 쓰레기 소각장 문제와 관련해서 노동조합에서 돈 천만써가면서 학자들에게 용역 받아가지고 시민들이 편에서서 쓰레기 소각장을 설치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가를 대대적으로 홍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노동조합이 아주 특수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노동조합의 정상적의 활동속에서 얼마든지 이루질 수 있는 일입니다. 물론 이런 것들은 단위노동조합이 해내기는 쉬운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노동조합의 연합체가 나서서 이런 굵직굵직한 것들을 해나갈 때 노동자들 스스로에게도 이익이 되고 노동조합에 대한 사회적 여론도 상당히 호전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의 노동조합운동은 어느정도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ABCD...Z까지 있다면 겨우 A,B정도만 하는 것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한창 싸움이 잘될때에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침체기 정세속에서 대중들이 쉽게 참여하지 않고, 특히 사람들이 민감해지는 상황에서는 중산층- 7~8월 투쟁에 그냥 가만히 있던 사람들이 일단 노동자들이 한발 물러서고 있는 것으로 보이면 금방 들고 일어나 노동자들을 포위하고 여론의 공세를 쏟아 붇습니다.
우리가 이런것에 주눅들 필요는 없지만 활동을 다변화시키는 것이 상당히 중요해집니다. 이것을 개별 노동조합에서는 상당히 부담이 되는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조직문제와도 연관이 됩니다. 가장 기본적으로 산업별로 재조직화가 되어야 합니다. 산업별로 재조직화 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민주노동운동은 상당히 중요한 시기에 놓여 있다고 봅니다.
이것으로 현재까지의 노동조합운동사를 대략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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