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에서 민주노총 건설까지! 그리고 현재.
내가 살아가는 이 시대, 역사에 대하여.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를 돌아본다는 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우리는 박정희로부터 시작하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정권으로 이어지는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동시대인이다. 그러나 같은 시대를 살고, 똑같은 사건을 경험하면서도 역사에 대한 기억과 해석은 각양각색이다.
6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역사는 독재정권으로부터 시작하여 신자유주의 정권으로 이어지는 과정이었으며 이에 맞선 노동자, 민중의 투쟁이 함께 한 역사였다.
노동자, 민중을 향한 정권의 총칼이 있었는가 하면, 경제개발을 향한 장밋빛 환상이 있었고, 무수한 이데올로기가 있었다. 그 속에서 노동자, 민중은 때로는 짓눌리고, 때로는 체념하기도 했지만 불굴의 저항으로 노동자, 민중의 역사를 도도하게 써내려 왔다.
이 시간을 통해 나는 내가 경험한 시대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며 살아 왔는가 생각해 보자. 만일 달리 이해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왜 그런 것인지 새겨보며 내가 살아왔고 살아 갈 이 시대 속에서 노동자의 올바른 역사관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도록 하자.
1. 70년대 정치, 사회, 경제상황과 노동자들의 삶
1) 박정희 정권의 폭압적인 등장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를 필두로 서울을 점령한 군사쿠테타 세력에 의해 4.19 혁명의 변혁 열기는 단숨에 식어 버렸다. 박정희는 '반공'과 '재건'을 내세워 모든 노동조합과 정당, 사회단체를 해체하고 폭압적인 독재체제를 완성시켜 나갔다. 군복을 민간복으로 갈아 입고 장기집권에 나선 박정희는 굴욕적인 한일협정, 미국 주도 경제체계로 편입, 각종악법을 내세워 민주세력을 탄압함과 동시에 자시의 정치 기반을 다져갔다.
군사정부는 일체의 쟁의를 금지시키고 5월 23일부로 모든 정당과 사회단체를 강제해산 시켰다. 이 과정에서 한국노련, 교원노조 등 노동단체가 해체 당한다. 그리고 군사정부에 의해 노동조합이 재조직되기 시작했다. 군사정권은 신고제였던 노조 설립을 허가제로 바꾸고 9명으로 구성 된 재건조직위원회를 만들어 노조를 만들어 갔다. 노조는 중앙집권적 산별노조체계였는데 군부는 산별노조에 노동자 통제권을 부여하고 이를 통해 노동조합을 일사불란하게 장악하겠다는 음모를 드러냈다. 재건조직위는 1961년 8월 30일, 12개 산별을 일사천리로 결성하고 한국노총을 출범시켰다.
한국노총은 "군사혁명의 성스러운 봉화를 선두로 국가재건에 전력을 다한다"는 선언을 채택하고 정치적 중립을 표방함으로 노동조합의 정치활동을 스스로 포기한다.
2) 친미와 친일, 구조적 정경유착으로 얼룩진 경제개발정책
박정희는 "혁명은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재건이다. 기업인들이 앞장서 경제재건에 나서달라"며 경제성장을 재촉했다. 그러나 한국의 경제개발정책은 미국과 일본에 전적으로 의존해 진행됐다.
2차 대전 뒤 강대국으로 떠오른 미국은 후진국 경제를 발전시켜 제3세계 민족주의를 희석시키고 사회주의세력의 확장을 막으려 했다. 한국은 소련, 중국, 북한 등 공산주의 세력과 전선을 맞댄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에 미국은 한국경제를 근대화이론의 성공적인 모델로 만들려는 야심찬 계획으로 한국경제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1962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국내자금조달로 실패하자 1963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외자에 의존한 경제개발 계획을 새로 마련했다.
그리고 일본과는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을 체결, 식민지 통치에 대한 아무런 사과와 보상도 받지 못한 채 몇 푼의 차관과 정치자금만으로 국교를 정상화시켜 버렸다.
또한 박정희 정권의 수출드라이브 정책은 수출만 한다하면 기업들에게 돈과 온갖 특혜를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럴수록 정경유착은 구조적으로 뿌리 깊이 내려갔다. 그 결과 경제적으로는 자본축적 방식을 종속적으로 재편해 나갔으며, 친미와 반공을 앞세워 진보세력과 노동계급의 저항을 통제하는 독재정권의 표본이 되어갔다.
3) '한강의 기적' 속 '선성장 후분배' 노동착취
박정희 정권은 독점자본을 지원하면서 저임금, 저곡가 정책을 강력히 밀고 나갔다. 경공업 중심의 수출산업화 정책은 '선성장 후분배' 논리 속에 가혹한 노동착취만을 강화했다. 즉 '중단없는 전진'을 외친 박정희의 경제정책은 정치발전이나 삶의 질을 무시한 채 오로지 경제성장만 최우선 과제로 삼았던 것이다.
60년대에 시작한 경제개발계획으로 우리나라 경제는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외형적 성장을 가져왔다. 국민소득은 연평균 8.7% 성장률을 보였으며, 수입은 62년 4억 2천 달러에서 72년 24억 달러로, 수출은 5,500만 달러에서 11억 달러로 대폭 증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외형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물가는 연평균 13.4%나 올랐다. 반면 임금은 60년대 연평균 3.6%, 70년대 초는 2% 남짓 올라 노동자들은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노동시간도 1963년 50시간에서 1969년에는 주당 57.2시간으로 늘어나는 등 극도의 노동착취가 이어졌다.
경제발전이라는 장미빛 환상 속에서 빚더미에 앉은 농민들은 1970년대 초까지 해마다 50만명씩 대도시로 몰려가 빈민가를 형성하고 극빈자 생활을 해야만 했고, 노동자들은 저임금, 장시간 노동 속에서 '한강의 기적'을 위해 '산업역군'이라는 미명 아래 기계처럼 일해야만 했다.
< 생계비와 임금 비교 / (제조업) >
청계피복노동자 임금실태(1970년): 재단사(1,200명/5%) 30,300원, 미싱사(1,200명) 15,000원, 시다(1,200명) 3,000원
2. 70년대 노동자 투쟁 - '전태일에서 김경숙까지'
1)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전태일 정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노동자도 인간이다!"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을 품에 안은 채 불길에 휩싸여 절규하는 전태일의 외침은 군사독재정권 아래 잠자던 양심을 깨우고 70년대 노동운동에 불길을 당겼다.
22살 청춘을 불사른 전태일은 평화시장 재단사였다.
1964년 16살 나이에 시다로 평화시장에 첫발을 내 딛은 전태일의 가슴은 새로운 희망과 꿈으로 부풀었다. 한달 월급 1,500원, 일당 50원, 14시간 노동에 하루 일당이 커피한잔 값밖에 안 되는 기막힌 저임금이었다. 그러나 전태일의 머리 속은 주어진 여건 속에 열심히 일하여 셋방 한칸이라도 얻고 식모살이 하는 어머니와 길바닥에 버려진 막내 순덕이를 데려와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찼다.
1967년 2월 전태일은 그리도 바라던 재단사가 되었다. 그런던 어느날 한 미싱사 처녀가 일을 하다가 새빨간 피를 재봉틀 위에 왈칵 토해냈다. 전태일은 급히 돈을 걷어 병원에 데려가 보니 폐병 3기라고 했다. 직업병이었지만 그녀는 해고당하고 말았다.
그 일로 크게 충격 받은 전태일의 생각에 큰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죽어 가는 저 여공들을 살리자. 우리의 건강과 생명을 갉아먹고 삶의 모든 기쁨과 보람을 빼앗아가며 우리를 비정한 현실의 쓰레기로 만드는 저 잔인한 노동조건을 내 힘으로 바꾸어 보자.' 는 것이었다.
전태일은 아버지로부터 근로기준법이라는 것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근로기준법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근로기준법에는 하루 8시간 노동, 1주 1일 유급휴일이 정해져 있었고 유해위험 작업에 관한 규정, 여공에 대한 유급생리휴가, 여자와 18세 미만 연소 근로자의 야간 작업 금지, 건강진단, 재해보상 등 놀라운 사실들이 있었다. 전태일은 이렇게 좋은 법이 있는 줄도 모른 채 찍소리 못하고 살아온 자신이 너무나도 '바보' 같았다.
전태일은 재단사들의 모임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모임 이름을 '바보회'로 정했다.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며 동료들과 근로조건 개선 의지를 갖게 됐고 주위 친구들이나 여공들에게 기회가 있는 대로 근로기준법을 설명했다. 이때 전태일은 법학도를 상대로 만든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며 '내게 대학생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하고 안타까워 한다. 갈수록 바보회 회원들이 늘어났고 그들의 활동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도 많아졌다. 그러자 전태일은 '위험분자'로 찍혀 일터에서 쫒겨 나고 만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전태일은 '바보회' 회원들과 함께 노동실태조사에 나선다. 설문지를 300부 인쇄하여 100부 정도 배포한 가운데서도 30부 밖에 수거하지 못했지만 전태일은 설문지를 분석, 집계하여 이를 근거로 근로기준법상의 감독권행사를 요구하기 위해 시청, 근로감독관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돌아 온 것은 싸늘한 무관심 뿐 이었다. 갈수록 전태일은 가족에 대한 죄책감, 실직자로서 우울함과 불안, 생계의 어려움, 바보회의 파탄, 사회의 무관심, 두꺼운 현실의 벽 등으로 인해 죽음과도 같은 시련을 맞아야 했다. 결국 전태일은 평화시장을 등지고 삼각산 공사판으로 나갔다. 그곳에서 전태일은 끝내 저버리지 못한 결단을 한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 어린 동심 곁으로.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1970년 8월 일기)
1970년 9월 다시 평화시장으로 돌아온 전태일은 겨우 취직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다시 재단사들을 모아 '삼동친목회'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이때를 전후하여 전태일은 틈나는 대로 시청, 노동청을 찾아다니며 진정을 내고 신문기자를 만나거나 방송국을 찾아다니며 평화시장 노동실태를 보도해 달라고 매달렸다.
삼동친목회는 평화시장 노동자를 대상으로 또다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126매 설문지가 성공적으로 회수되어 그 결과를 모아 노동청장 앞으로 '평화시장 피복 제품상 종업원 근로개선 진정서'를 냈다. 다음날 10월 7일, 각 석간신문에 평화시장 참상이 보도되었다. 삼동친목회 회원들은 손목시계를 담보로 맡기고 신문을 사들여 평화시장으로 달려가 배포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의 반응은 아주 놀라왔다. 평화시장 일대는 축제분위기로 넘쳤고 군데군데 노동자들이 모여 신문을 돌려보고 웅성이기 시작했다.
10월 8일, 전태일 등 3명은 삼동회를 대표하여 작업시간 단축, 1주 1일 휴일, 1년 2회 건강검진, 시다 임금 100%인상, 여성 생리휴가 보장, 노조결성 지원 등 내용을 담은 건의서를 평화시장 주식회사에 제출했다. 평화시장이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기업주와 정부당국은 당황했고 대통령선거를 앞둔 시기라 당국은 여론동향에 민감했다. 노동청에서는 근로조건을 개선시켜 주겠다며 삼동회 회원들을 회유했다. 말로써 해결이 안되자 삼동회는 노동청 국정감사가 있는 날을 택해 데모를 하기로 했다. 이를 눈치 챈 근로감독관은 전태일을 찾아 와 근로조건을 약속대로 개선하겠다고 약속하며 데모를 중지할 것을 요구했다. 일단 기다려 보기로 하고 데모를 보류했으나 국정감사가 끝나자 언제 그런말 했느냐는 듯이 시치미를 뗐다.
격분한 삼동회 회원들은 10월 24일 오후 1시 다시 데모를 감행키로 결의했다. 그러나 경비원과 사복경찰의 삼엄한 경비와 감시로 성사시키지 못했다. 경찰과 회사는 11월 7일까지 기다려 보라고 회유했다. 그러나 약속날짜가 되었건만 아무것도 지켜지지 않았다. 전태일은 회원들에게 몹시 심각한 표정으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하자고 제의하며 모두 희생 할 각오로 싸우자고 말했다.
마침내 11월 13일 오후 1시, 그날은 아침부터 옅은 잿빛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었다. 경찰과 경비원들의 저지를 뚫고 삽시간에 500여명이 국민은행 앞길에 모여들었다.
그때 갑자기 불길을 뒤집어 청년하나가 나타났다. 그는 몇마디 구호를 짐승처럼 외치다가 그 자리에 쓰러졌다. 바로 전태일이었다.
병원으로 옮겨진 전태일은 친구들에게 "부모에게 효도할 것과 자신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 것"을 당부하면서 대답을 요구했다. 대답이 없자 태일은 벌떡 일어나려 하면서 "왜 대답이 없는가?"하고 크게 외쳤다. 놀란 친구들은 "네 말대로 꼭 하겠다."고 약속했다. 전태일은 친구들에게 거듭 맹세할 것을 약속 받으며 눈을 감았다.
전태일의 죽음은 비인간적 노동착취와 빈곤에 맞선 인간선언이자 노동자로서 최소한의 권리를 찾기 몸부림이었다. 전태일은 노동자가 이윤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인간대접을 받고, 노동이 즐거운 세상을 위해 온몸 바쳐 죽어갔다. 하지만 그는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영원한 노동자 전태일'은 한 점 불꽃으로 사라졌지만 전태일 정신은 우리 가슴에 살아 투쟁으로 되살아 나고 있다.
2) 독재를 넘고, 어용을 넘어 피어나는 민주노조 운동
전태일의 장례식이 거행되고 2주일 뒤인 11월 27일, 연합노조 청계피복 지부가 결성됐다. 청계피복 노동자 투쟁은 70년대 노동자 투쟁의 발원지였으며 청계피복 지부는 70년대 최초의 민주노조가 됐다. 이 투쟁을 계기로 노동자 투쟁이 곳곳에서 폭발하기 시작했고 민주노조 건설과 어용노조 민주화 투쟁이 이어졌다.
또한 전태일의 분신은 사회적으로도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이 사건을 계기로 종교계, 지식인들이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이들의 투쟁은 70년대 내내 이어진다.
1969년 3선 개헌안을 날치기 통과시키고 1971년 선거에서 간신히 이긴 박정희는 1971년 12월 비상사태를 선포,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한다. 그리고 집회, 데모, 노동자의 단체행동권을 전면 제한하고 대통령은 초헌법적인 비상대권을 갖는다.
또한 1972년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국정조사활동 중인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의 정치활동을 금지시키는 한편, 비상국민회의가 국무회의와 국회의 입법기능을 떠맡도록 하면서 10월 유신을 단행했다.(대통령임기 4년에서 6년으로, 중임제한 예고를 없애고 간접 선거제로 전환)
박정희는 경제개발과 새마을운동을 주요 지배이데올로기 삼아 민중의 거센 반대 속에서도 9차례에 걸친 긴급조치로 국민기본권을 박탈하고 극도의 탄압을 일삼았다. 그 속에서 유신반대 투쟁은 갈수록 격화되어 갔다.
또한 태생적으로 정부의 영향력 아래 있을 수밖에 없었던 한국노총은 1970년대 들어 60년대 전개했던 최소한의 투쟁마저 저버린 채 그 어용성을 더욱 노골화했다. 유신반대 투쟁과 미조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확산되고 있을 때 유신체제 전면지지와 노사협조를 선언했다. 또 노동자의 단결 된 힘을 바탕으로 하는 노조운동을 포기하고 반공주의를 앞세우며 정부와 기업에 대화, 건의, 진정하는 방식을 택했다. 심지어 '연도별 쟁의현황' '연도별 쟁의행위 현황' 마저도 노사협조주의에 배치된다고 생각하여 중단했고 오히려 하부조직 탄압, 부패, 비민주화를 일삼았다.
" ....우리는 국가 이익 우선주의 법에 입각하여 .....임금인상 일변도의 활동노선을 지양하고 생산성향상 운동을 통한 분배원천의 증대라는 노사공동의 이익의 영역을 찾아 서로 협력하는 보다 건전한 기업풍토를 이룩할 수 있는 새로운 제도를 마련하는데 최선을 다 하려는 것이다....."
(1973년 한국노총의 운동방침)
그러나 군사정권과 한국노총의 어용성 아래서도 노동자들의 투쟁은 (광산노조, 철도노조, 조선공사, 증권거래소, 주한미군내 노동자투쟁등)끊이지 않았다. 특히 전태일의 분신 이후 노동자 투쟁이 잇따라 1969년 130건이던 노동자 투쟁이 1970년 165건, 1971년 1,656건으로 크게 늘어났고 민주노조운동이 꽃피기 시작했다. 1970년부터 79년까지 모두 2,500개의 노조가 만들어 졌다.
3) 동일방직 노동조합 수호 투쟁
1970년대 초반이 민주노조 건설과 민주화를 통해 노동운동 주체가 바뀌는 시기였다면 70년대 중반은 정부와 자본, 심지어 상급노조에 의한 민주노조 파괴에 맞서 대항하는 노동조합 수호 투쟁 괴정이라 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동일방직 1,2차 조직수호 투쟁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 노동자 투쟁의 또다른 특징은 중요 노동자 투쟁이 정치쟁점으로 부각되면서 반정부 투쟁 성격을 띠고 사회여론화 되었다는 것이다.
제1차 투쟁 조직수호 투쟁 : 알몸시위 (76.7)
1966년 부터 갖기 시작한 인천도시산업선교회의 소그룹 활동이 결실을 맺으면서 1972년 2월 동일방직에 주길자 집행부가 들어 서면서 노조민주화 기운이 싹트기 시작했다. 순조로운 과정을 거쳐 75년 이영숙 지부장을 선출하며 조직기반을 다져나갔다.
그러나 관계당국과 결탁한 노조파괴 공작으로 76년 들어 서면서 시련을 맞게 됐다. 회사는 2월 대의원 선거에 노골적으로 개입하고, 4월 3일 대의원대회마저도 남자대의원 5명을 동원하여 무산시켜 버렸다. 그리고 7월 23일 관계기관의 비호를 받으며 고두영 등 회사측 대의원만 참석하는 대의원대회를 개최했다. 경찰은 순조로운 진행을 위해 지부장 등 노조간부 10여명을 연행하고 조합원들이 대회에 참석하는 것을 막기 위해 기숙사에 못질을 하고 현장 문을 잠가 버렸다.
결국 고두영 측 대의원만 참석하여 고두영을 지부장으로 선출했다. 이에 격분한 노동자들은 밤 10시 퇴근반 부터 '지부장 석방과 노조활동 보장, 대의원대회 무효' 등을 주장하며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그러자 회사는 물과 전기를 끊고 화장실 문을 잠가버리고 음식 반입마저 금지시켰다. 다음날, 7월의 뜨거운 태양아래 노동자들은 허기에 지쳐 쓰러져 갔다. 저녁 6시 반, 기동 경찰이 연행 버스를 대기시키고 방망이를 들고 여성노동자들을 포위해 들어오며 5분간 시간을 줄테니 해산하라고 경고했다.
이때 놀랄만한 일이 벌어졌다. 여성노동자들은 작업복을 벗어 던지고 노총가를 목이 터져라 불러댔다. 아무리 비열한 경찰일지라도 반나체 여성의 몸에 손을 대지는 않으리라 믿은 이들은 여성의 수치마저 잊은 채 절규했다. 그러나 경찰의 무자비한 연행이 시작됐다. 곤봉이 난무하고 가냘픈 여성노동자들은 피를 흘리며 신음했다. 어떤 노동자는 죽어도 노동조합을 사수하겠다고 속옷마저 팽개쳤지만 경찰은 나체 그대로 연행해 갔다. 차바퀴에 누워 저지하려 애썼지만 머리채 잡혀가며 몽둥이로 얻어 맞고 끌려가는 상황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이 사태로 72명이 연행, 50명이 충격으로 졸도, 70명이 부상, 14명이 병원에 입원했다.
이러한 강제헤산에도 불구하고 여성노동자 투쟁은 더욱 높아가 26일에는 서울 섬유노조 본조로 30명이 몰려가 연행노동자 석방을 요구했다. 그 결과 연행자들이 석방됐다. 일주일 뒤 본조에서 수습대책 위원장이 내려왔으나 회사와 공모하여 노조를 파괴하려 했다. 이에 노동자들은 사회양심세력과 연대하여 사건 해부식을 명동카톨릭회관에서 갖기로 했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요구조건이 모두 들어 지면서 처절했던 알몸시위는 승리로 끝났다.
제2차 노동조합 수호투쟁 : 똥물사건 (78.2)
1978년 섬유노조 대의원대회에서 섬유노조 산하 분회나 지부는 본조에서 사고지부로 규정지으면 일체의 업무를 본조에 인계한다는 내용의 규약을 개정했다. 그리고 한국노총 내 <근로환경 개선 대책위>를 구성하고 그 산하에 조직행동대를 편성했다. 그것은 도시산업선교회등 종교단체와 관련있는 민주노조를 파괴하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다.
동일방직 노조 집행부는 78년 정기총회를 2월 중에 열기로 하고 2월 21일 78년 총회를 위한 대의원 선거를 실시하였다. 새벽 5시 50분, 아침반으로 출근하는 조합원들이 회사정문에 들어서자 노조사무실에서 기물부수는 소리와 비명소리로 시끄러웠다. 40여개 투표함이 다 부서지고 아수라장이 된 노조사무실에 회사의 조종을 받은 남자 5-6명이 방화수 통에 똥을 담아 가지고 고무장갑 낀 손으로 선거하러 오는 여성조합원들의 얼굴과 옷에 닥치는 대로 똥을 발랐다. 회사가 지지하는 지부장 후보 박복례는 '저년에게 먹여라' 지시했고 남자들은 똥을 여성노동자들의 입에다 바르고 젖가슴에까지 쑤셔 넣었다. 심지어는 기숙사로 도망간 조합원 머리에 똥바께스를 뒤집어 씌우기까지 했다. 구경만하고 있는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하니 욕설만 퍼부어 댔다, 한시간 뒤 섬유노조 조직행동대가 나타나 노조를 돕기는 커녕 노조를 강점하고 대회를 방해했다.
오후 1시경 대회를 치루지 못한 노동자들이 삽시간에 500여명이 모여 농성을 시작했다. 그러나 한겨울에 작업복 하나 걸치고 농성하는 노동자들을 100여명의 경찰기동대가 에워싸고 강제해산 시켰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섬유노조에서는 동일방직 노조를 사고 지부로 규정하고 집행부를 해산시키고 일체를 접수하려했다. 그리고 동일방직 지부 의장단전원을 제명하고 이에 반항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위원장 임의로 조치를 취해도 좋다는 전권을 위임했다.
이에맞서 동일방직 노조는 노동조합 수호를 위해 국무총리가 참석한 노동절 행사장에서 '노동귀족 물러가라!' 외치며 시위를 했고, 명동성당, 답동성당, 기독교회관 등에서 단식농성을 전개했다. 이에 호응하여 인천산선 조화순목사 등 67명이 동조단식에 들어갔고 동아자유언론수호 기자들도 단식에 들어갔다. 김수환 추기경도 정부와 노총에 강력히 항의하고 3월 21일 민주인사와 단체로 구성 된 <동일방직사건 긴급 대책위원회>가 구성됐다. 사회 각계각층의 완강한 투쟁에 부딪히자 정부는 종교계와 협상을 통해 요구조건을 수락했다. 그러나 회사는 농성을 풀고 복귀한 124명을 해고했고 섬유노조 본조는 이들 명단을 적은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전국 사업장에 배포하여 이들의 취업을 원천적으로 가로막았다. 이때부터 동일방직 노동자들은 80년 5월까지 줄기차게 현장복귀 투쟁을 벌인다.
이 시기 노동조합 탄압은 정치권력과 한국노총, 기업주가 결탁하여 조직적, 폭력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조직적인 노조파괴 공작에 맞서 당시 민주노조들은 치열하게 투쟁했고 민주세력과 연합하면서 대정부 투쟁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이러한 투쟁들이 모두 노동조합들의 연대투쟁과 조직건설로 발전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70년대는 전국 혹은 지방조직이 주도하는 노동운동이 없었던 유일한 시기로 역사에 남는다. 일제시대에는 조선노동총동맹이, 해방정국에서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가, 1950-60년대는 대한노총(60년대 한국노총)이 당대의 투쟁을 이끌었지만 70년대는 소위 민주노조라 불리는 개별노조와 미조직 노동자들의 자연발생적인 투쟁이 주를 이루었다.
4) YH노동자 김경숙의 죽음과 유신체제 붕괴
회사설립 4년 만에 종업원 4,000여명의 국내 최대가발업체로 성장한 YH무역은 가발산업의 사양화, 경영부실, 재산해외 도피 등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79년 3월 일방적으로 폐업한다. 노조는 '공장폐쇄는 근로자들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비인도적인 처사이고 몇 사람만을 위한 사기극'이라면서 농성투쟁을 벌였다. 투쟁기세에 밀려 잠잠하던 회사는 7월 들어 폐업책동을 벌이다 8월 6일 다시 폐업공고하고 기숙사 폐쇄, 퇴직금, 해고수당 수령하라고 최후통첩 했다.
이에맞서 YH무역 노동자 170여명은 '회사를 정상가동하고 생존권을 보장하라!'며 신민당사에 들어가 밤샘농성을 벌인다. 그러자 박정희 정권은 경찰 2,000여명을 신민당사에 투입하여 강제해산 시키는데 잔혹한 진압과정에서 스물한살 여성노동자 김경숙이 목숨을 잃고 만다. 이어서 노조 지부장등 간부와 종교인, 재야인사 등을 구속했다.
이 사건을 계기 독재타도를 외치는 농성과 시위가 잇따랐다. 그 와중에 박정희는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의 당총재 자격과 의원직을 빼앗으며 정치적 탄압을 가하고 이에 맞서 신민당의원 전원이 의원직을 사퇴한다. YH사건 여파는 학생운동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10월 16일 부산대 학생들의 시위가 도시 한복판에 일어나자 수만의 민중이 모여 '독재타도'를 외쳤다. 다음날은 동아대 학생들의 시위로 이어지며 '독재타도' 열기를 달구어 갔다. 그러자 박정권은 10월 18일 부산에 계엄령발표, 20일에는 마산, 창원에 위수령을 내리고 군을 투입했다.
그러나 그 치열했던 투쟁(부마항쟁)은 지배층 안의 분열을 촉진시켜 유신체제의 몰락을 가져오는 계기가 됐다. 10월 26일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저격으로 시해. 마침내 기나긴 유신체제는 무너지고 만다.
결국 YH 노동자 투쟁은 60년대 이후 한국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누적돼 온 사회적 모순이 첨예한 형태로 폭발한 투쟁이자, 유신체제 붕괴의 도화선이 됐던 것이다.
<1970년대 쟁의현황>
70년대 노동자 투쟁의 특징과 역사적 의의
- 노동자의 생활과 근로조건, 사회분위기가 극도로 열악했던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은 자연발생적 분규와 폭동으로 발전했으며 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양상으로 나타났다. (광주대단지 사건, 현대조선소 폭동, 전태일 열사의 분신등)
- 단위사업장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투쟁은 임금인상이나 부당해고 반대, 근로조건 개선, 그리고 노조결성과 활동보장 등이었다.
- 유신체제의 비상사태와 긴급조치로 상징되는 억압적인 정치체제와 집회, 데모, 노동자의 단체행동권이 제한 된 초법적인 탄압 속에서도 강고하고 치밀한 현장활동을 통해 키워진 조직력을 바탕으로 자본과 정권의 탄압에 맞서 꿋꿋히 민주노조를 사수했다.
- 경공업중심 여성노동자들이 투쟁의 중심이었으며 상급노조의 어용성과 부패에도 불구하고 종교단체와 학생들의 지원 속에서 개별사업장 중심의 민주노조 투쟁이 분산적으로 전개됐다. 이러한 경험은 80년대 노동운동에서 한국노총에 대별되는 민주노조운동의 상을 제시해 주었다.
- 그러나 70년대 민주노조투쟁은 전국적인 대중기반이나 연대기반을 갖고 있지는 못한 한계를 안고 있기도 하다
3. 새로운 투쟁을 향하여!
1) '서울의 봄'과 노동자 투쟁
암흑의 유신체제는 붕괴됐지만 12.12쿠테타를 통해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다시 등장했다. 그러나 1980년 봄이 오면서 공장과 학원에서는 군부독재 종식과 민주정치 실현을 외치는 민주화 기운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생존권 투쟁과 함께 노동조합 민주화 투쟁에 나섰다. (사북탄광, 일신제강, 동국제강, 인천제철 등)
5월 15일에는 학생과 시민 수십만명이 서울역 광장에 모여 계엄철폐, 유신세력 퇴진을 외치면서 사회민주화를 요구했다. 그러자 신군부는 5월 17일 비상계엄 선포지역을 전국으로 확대, 학생운동 지도부, 김대중을 비롯한 재야와 제도정치권의 주요인사들을 재빠르게 체포, 구속했다. 79.10.26. 79.12.12. 80.5.15. 80.5.17로 이어지는 격변의 역사는 마침내 5.18 광주로 이어져 거센 민중항쟁의 불길로 일어선다.
사북탄광 노동자 투쟁
80년 4월, 강원도 사북탄광에서는 노조지부장이 회사측과 짜고 임금인상을 20%로 낙찰시킨데 맞서 16일 부터 광부 30여명이 지부장 사퇴를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그러자 경찰은 이재기를 피신시키고 농성노동자들을 제지했다. 21일 세번째로 30여명의 노동자들이 농성을 벌이자 경찰 짚차가 광부 4명을 치고 달아 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시작했다.
동원탄좌 노동자 3천 5백여명과 2천 5백여 가족까지 합세하여 경찰을 4Km밖 고한까지 밀어내고 바리케이트를 쳤다. 고의로 광부를 친 사건은 '막장인생'이라 멸시 받던 광부들의 분노를 일시에 폭발케 했던 것이다.
분노한 노동자들은 이재기의 사택과 그를 지지했던 대의원들의 사택을 돌면서 집기를 부수고 이재기 부인(당시 소비조합장으로 생필품 강매와 매점매석으로 원성이 높았음)을 혼쭐을 내주었다. 또한 사북지서를 점거하고 무기고를 털어 무기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경찰 한 명이 사망하고 46명이 부상당했다. (당시 경찰발표)
사태가 심각하게 되자 강원도지사, 치안본부, 전국광산노조위원장, 광부대표가 협상을 시작. 임금인상, 상여금 인상 등 11개 항에 합의하면서 사북사태는 마무리되었다. 그 뒤 5월 5일 최규하는 대통령 권한대행의 '불법행동엄단' 발표와 함께 치안본부는 1백54명의 노동자를 연행하고 이중 28명을 구속하여 군법재판애 회부했다.
4일 동안 사북읍 전체를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는 등 폭발적인 투쟁으로 타올랐던 사북사태는 광업소 노동자들의 열악한 작업 실태와 어용노조와 자본, 경찰의 결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2) 죽음 넘고, 시대의 어둠을 넘었던 광주민중항쟁
신군부의 5.17 계엄확대조치는 '서울의 봄'으로 상징되던 민주화 운동을 한꺼번에 침묵케했다. 전국의 주요 거리와 대학에는 군인의 총칼과 탱크만이 가득했다.
계엄확대 뒤 태풍 전야 같은 침묵을 깨뜨린 곳은 광주였다. 광주, 전남지역은 높은 경제성장률에도 불구하고 경제발전이 크게 뒤떨어진 곳이었다. 게다가 박정희의 권력 독점 속에서 호남민중의 정치, 경제적 피해의식은 재야, 학생, 그리고 민중들로 하여금 어느 지역 못지 않게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갖게 했다.
또한 보수집단이 가장 꺼려했던 야당정치인 김대중이 이곳에 정치적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신군부가 정권창출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는 좋은 조건으로 작용하였다. 신군부는 계엄을 확대한 뒤 전국에서 터져 나올 지 모르는 민주화 요구를 '광주'라는 한 지역에서 폭발시켜 짓누름으로써 민주화 투쟁에 쐐기를 박고 유신체제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재편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광주 민중항쟁의 의의
- 신군부와 독점자본에 맞서 독재에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하고자 했던 민중항쟁으로서 신군부의 폭력성을 그대로 드러나게 했다.
- 또한 이전에는 미국의 본질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독점자본에 뿌리를 두고 있는 독재권력을 지지하는 미국의 실체를 드러냈다. 이것은 항쟁 뒤 반미투쟁, 수입개방반대투쟁으로 이어졌다.
- 투쟁과정에서 나타난 시민군의 '무장투쟁'은 항쟁의 지도부가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생명을 지키려는 하나의 수단이었지만 그것은 대중운동이 특정한 상황 속에서 무장투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개연성을 보여주었다.
- 또 민족민중운동의 이념, 동력, 대상, 방법 등 한국사회 변혁에 대한 근본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민족민중운동의 질적 발전을 이끌어 낸데 역사적 의의가 깊다.
3) 그러나 다시 불붙는 투쟁
폭압적으로 정권을 잡은 신군부는 1983년 국민화합이라는 명목아래 유화정책 펴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광주학살로 인한 정권의 정당성 결여와 외교적 압력을 완화하고 올림픽 개최 등 분위기를 조성해 가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블랙리스트 강화, 공단지역 주민조사 실시, 노조설립신고 필증교부 거부등 노동자들에 대한 억압적 통제는 지속됐다. 이에 과거 민주노조운동을 벌였던 사업장에서는 '블랙리스트 철폐 운동'으로 노동운동에 대한 불씨를 지폈고 이듬해 3월 10일에는 해고되었던 선진노동자들이 모여 '한국노동복지협의회'를 결성하여 노동법개정운동을 주도한다.
또한 절박한 생활상의 요구와 민주적 권리수호를 위해 집단적 저항도 나타났다. 1984년 5월 대구 택시기사들의 총파업이 전국 도시로 확산되면서 노동운동에 불을 지폈다. 1985년 들어서면서 대우자동차 투쟁 등 상반기 노동쟁의가 164건으로 앞 해에 견주어 120%나 늘었다. 투쟁양상도 대규모 사업장에서 투쟁과 연대파업이 일어나는 등 앞 시기와는 점차 달리하기 시작했다.
85년 6월 구로지역노동자 동맹파업
1985년 6월을 뜨겁게 달구며 구로지역의 노동자들이 동맹파업을 벌였다. 구로노동자동맹파업은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일어난 동맹파업이었다. 85년 6월 22일 구로공단에 있는 대우어패럴 노동조합 간부 세명이 경찰에 구속된 사건을 계기로 그 투쟁이 시작되었다.
구로의 노동자들은 대우어패럴 노조간부 구속이 단지 대우어패럴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들 모두의 문제라고 느꼈다. 그리고 '70년대 선배노동자들이 치열하게 짤 싸웠지만 따로 따로 싸우다 80년대 들어 모두 따로 깨지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역사의 경험을 되새기면서 연대투쟁으로 대응할 것을 결의하였다.
6월 24일 오전 대우어패럴노조가 파업에 돌입한 것을 시작으로 효성물산, 가리봉전자 등 9개노조 2,500여명이 '구속자 석방, 노동압법 철폐, 해고자 복직, 최저생계비 보장, 노동부장관 퇴진'등을 외치며 구로의 6월 파업투쟁에 참가하였다. 투쟁은 노동운동 단체들의 지지농성과 22개 사회단체들의 공동성명 채택등으로 확산되었다. 전두환 정권은 폭력경찰을 동원하며 강제해산하고 43명 구속, 2,000여명을 해고시켰다.
그러나 7일간의 구로동맹파업은 전두환 정권의 탄압 아래에서 동맹파업을 벌이고 지지연대투쟁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노동운동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구로동맹파업은 연대의 정신을 실천으로 보여주었고, 노동3권 보장과 노동부장관 퇴진 같은 정치적 요구를 내세웠으며, 노동조합에 바탕을 두면서도 대중적인 정치투쟁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가 있다. 또 구로동맹파업은 87년 7.8.9 노동자대투쟁과 그 뒤 활발하게 전개된 노동자 연대활동 연대투쟁의 밑거름이 되었다.
4. 87년 노동자 대 투쟁과 함께 시작된 민주노조운동
1) 6월 민주화 항쟁
1986년 2.12 총선에서 여소야대 국회가 만들어 졌고 그 결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론을 요구하는 개헌정국이 이어졌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자 전두환 정권에 대한 민중의 분노는 폭발하기 시작했다. 박종철군 추모대회, 고문추방 민주화 행진 등 집회에서 '직선개헌' '정권타도'를 외쳤다. 그러자 궁지에 몰린 전두환 정권은 지금까지의 모든 개헌 논의를 물거품으로 만드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4.13 호헌 조치에 맞서 변호사, 종교단체, 재야 등 사회 각계각층의 반대성명이 들불처럼 번져가는 가운데 5월 20일 천주교정의수현사제단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조작발표 되었다고 성명을 발표한다. 이것은 전두환 정권의 도덕성을 뿌리째 뒤흔들면서 6월 민중항쟁의 불길로 타올랐다.
6월 10일, 전두환 정권이 잠실체육관에서 '민정당 제4차 전당대회 및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를 열고 노태우를 다음 대통령후보로 지명하고 있을 때, 전국 22개 도시에서는 국민운동본부가 주관하는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직,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국민들의 열화와 같은 지지 속에 진행되고 있었다.
6.10 국민대회가 명동성당 집회, 18일 최류탄 추방대회, 26일 국민평화대행진으로 이어지면서 수십, 수백만 군중이 집회 대열에 합류했다. 결국 민족민중세력의 투쟁으로 전두환 정권은 직선제 개헌안을 받아들인 6.29선언을 발표한다.
2) 87년 7,8,9 투쟁을 동지여 기억하는가?
6.29 선언으로 투쟁이 주춤하고 있었지만, 노동자 투쟁은 6월 항쟁에서 확인한 민중의 힘에 대한 믿음과 군부독재 세력의 후퇴, 그리고 80년대에 다져진 역량을 발판으로 자연스럽게 터져 나왔다.
노동자 파업투쟁은 독점자본의 심장부인 울산에서 타올랐다. 7월 5일 현대엔진 노동자들이 서류탈취와 어용노조 결성에 맞서 투쟁에 들어간 것을 시작으로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등 현대그룹투쟁으로 확산되더니 마침내 부산, 마산, 창원, 구로, 인천 등 전국 공단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8월 들어 하루 400건이 넘는 쟁의가 터져 나왔고, 20일에는 하루 500건, 29일에는 743건이 되면서 노동자투쟁은 절정을 이룬다. 노동자투쟁은 제조업 뿐만이 아니라 광산, 운수노동자들 속에서도 격렬히 파업, 시위가 벌어졌다. 운동의 주력군도 여성노동자, 중소기업노동자에서 대기업의 남성노동자 중심으로 바뀌어 갔다.
이 기간에 무려 3,337건의 쟁의가 일어났는데 종업원 1천명 이상의 대규모 사업장 가운데서 75.5%에서 쟁의가 일어났다. 1987년 6월 말 2,742개이던 노동조합도 1989년 말 7,861개로 늘었고 조합원 수도 1백만명에서 190만여명으로 두배 가까이 증가했다.
7.8월 거세게 타올랐던 노동자 투쟁은 8월말 대우조선 이석규열사 민주국민장을 무력으로 해산시킨 것을 시작으로 가해진 정부의 강경탄압으로 수그러든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특징과 의의
- 하루 쟁의건수, 노조설립 수 등을 보더라도 87년 노동자 대투쟁은 한국전쟁 뒤에 벌어진 투쟁 가운데 그 규모가 가장 큰 전국적인 파업투쟁이었다. 또 제조업 대공장 노동자들이 투쟁에 앞장섰으며 사무전문직 노동자들도 노동운동 대열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 87년 이후 파업이 대부분 임금인상, 노동조건의 개선 등의 경제적인 요구 속에 출발했지만 이러한 경제적인 요구를 민주노조 건설이나 노동조합 민주화라는 자주적인 단결권 보장 요구와 밀접하게 결합해 투쟁을 전개했다.
- 특히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노조를 설립하기 힘들었던 상황이었음에도 '선파업 후교섭'을 통해 노동악법을 투쟁으로 무력화시켰고 투쟁의 성과로 민주노조운동을 꽃피우고 일상화시켰다.
- 기업별 노조체계에서 정부, 자본의 탄압에 맞서 강고한 연대와 단결로 투쟁을 엄호, 지지했으며 공장점거파업과 가두투쟁 등 강력한 전투성을 갖고 투쟁이 진행됐다.
4. 전노협에서 민주노총 건설까지!
1) 과거의 우리가 아니다.
97년 대투쟁을 경험한 노동자들은 더 이상 '주면 주는 대로, 시키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굴종적인 삶이 살지 않았다. '우리도 인간이다'. '사람답게 살아보자!' 라면서 억압과 착취에 저항하고 인간다운 삶을 확고하게 저항하였다. 노예의식이 아닌 계급의식과 과학적인 사상을 정립하면서 변혁의 힘있는 주체로 나섰다.
<표4> 87-89년 노동조합 조직현황
2) 노동자 전국 조직 건설 투쟁
⊙ 지역, 업종협의회 결성 : 87년 7~8월 대투쟁에서 89년까지
이 시기는 민주노조운동의 고양기로서 지역노조협의회와 업종노조협의회 결성 등 자주적 민주노조의 구심을 만들어 나가는 시기이다.
88년 지역, 업종별 연대만으로는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노동자들은 '전국노동법개정본부'를 결성하고 전국노동자대회개최 '노동법개정, '독점재벌해체'를 요구했다. 그리고 88년 하반기에 전국회의를 결성하므로 전국조직으로의 첫 발자국을 내딛는다. 또한 89년 해방 이후 최초로 세계노동절100주년 기념 한국노동자대회를 투쟁을 통해 조직한다.
이 시기에는 민주노조 사수를 위한 계급적인 연대가 활발했고 방어적이고 즉자적인 수준이기는 했지만 투쟁의 정치적 성격(노동법개정 투쟁, 공안합수부 폐지투쟁, 노태우 불신임 퇴진투쟁, 노동운동탄압분쇄투쟁)이 강화됐다. 이러한 투쟁을 통해 15개의 지노협과 9개의 업종협의회가 조직되었다.
⊙ 전노협, 업종회의 탄생 : 90~92년
1990년 1월 22일, 마침내 민주노조운동의 중앙구심 전국노동조합협의회가 결성되었다. 전국 14개 지역 노동조합협의회와 2개 업종별노조협의회 소속 총 602개노조, 19만 3천여 조합원을 포괄하는 조직이 결성 된 것이다. 이는 비록 13개 업종별 노동조합 전부를 포괄하지는 못하지만 민주노조운동의 확고한 구심과 추진력이 만들어 낸 쾌거였다.
한편, 전체노동자의 40%를 차지하는 사무전문직노동자들도 1990년 5월 KBS노조의 방송민주화 투쟁과정을 거치면서 '전국업종노동조합회의'를 조직하여 사무전문직 노동자들의 정치, 경제적 이익을 대변해 나간다.
조직건설과 90년 KBS, 현대중공업의 골리앗 투쟁, 전노협 총파업으로 이어지는 투쟁 과정 속에서 노동자들의 자생적 투쟁은 종지부를 찍고 조직적인 투쟁면모를 갖추게 된다.
이러한 조직결성과 투쟁은 민주노조총단결의 기운으로 이어졌다. 90년 하반기 전노협과 업종회의가 공동주최한 전국노동자대회에서 '노동운동탄압 분쇄와 91년 임,단투 승리를 위한 민주노조총단결'을 전면으로 내걸음으로서 생산직노동자와 사무전문직노동자가 민주노조총단결을 위해 투쟁해 나가는 계기를 만든다.
전노협 사수를 위해 투쟁하다 숨져 간 박창수 열사
한진중공업 노동자 박창수는 1990년 위원장선거에서 93%의 압도적 지지로 위원장에 당선된다. 그러나 그의 앞길은 순탄치 않았다. 전노협 와해공작(1990년)에 실패한 노태우 정권은 이듬해 현장과 지역부터 무력화시키는 공작에 착수했다. 그 첫 대상은 영남권. 당시 대기업 가운데 전노협 가입노조는 한진중공업이 거의 유일했고, 현장노동자들의 두터운 지지를 바탕으로 전노협과 부산지역 노조운동의 핵심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 때문에 한진중공업노조 탈퇴공작은 전노협을 약화시키는 핵심고리였다.
1991년 2월13일. 박창수는 대우조선 파업 지원방안을 '논의'했다는 이유만으로 전노협, 대기업노조 연대회의 간부 6명과 함께 구속됐다. 그리고 회유와 협박을 통한 탈퇴공작은 계속됐다. 심지어 인신매매범을 한방에 수용해 부인을 납치하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4월25일에는 부산의 한 카페에서 안기부 조정관이라는 사람이 노조 간부들을 두 차례 만나 전노협을 탈퇴하면 박창수 위원장을 석방할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던 5월4일 박창수는 이마가 6cm 쯤 찢어져 안양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이때부터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 5일, 안기부 직원이 입원실로 세 차례 전화를 걸어왔지만 교도관의 제지로 그의 부친과 노조 장세군 사무국장하고만 통화가 이루어지는 등 안기부 요원의 부산한 접촉시도가 있었다. 그리고 6일새벽, 병원 마당 시멘트 바닥에서 박창수의 시신이 발견됐다. 정부 기관은 투신자살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아무도 '투신자살'을 믿지 않는다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기 전에는 시신을 내줄 수 없다는 것이 유족과 노동자들의 주장. 하지만 검찰은 영안실 벽을 해머로 부수고 들어와 강제부검을 실시한 뒤 일방적으로 수사종결을 선언했다. 그 동안 가족들은 음식물반입조차 금지 당한 채 병원 한쪽방에 몇 일 동안 갇혀 있었다. 검찰의 발표는 그가 노동운동에 회의를 느껴 투신자살을 했다는 것. 그러나 링거를 꽂은 채 투신했다는 것도, 6층에서 뛰어내렸다고 보기 어려운 파편의 흔적도 의문이려니와 특별한 외상도 발견되지 않았다. 타살이 분명했지만 사건의 열쇠를 쥔 노조 사무국장은 자취를 감춰버렸고, 부검사진 한 장 넘겨받지 못했다.
민주노조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겼던 노동자 박창수. 그는 정권의 서슬퍼런 '전노협 와해공작' 앞에서도 조직을 사수하기 위해 목숨 바쳤던 진정한 노동운동가였다.
(노동과 세계 196호)
⊙ 대공장연대회의
1990년 말, 민주노조 투쟁에 힘입어 대우조선, 포항제철, 만도기계, 대림통상, 아세아자동차등 대공장노조에 민주집행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를 토대로 '대기업노동조합 연대회의'가 만들어지고 전노협과 전국임금인상공동투쟁본부를 구성하여 활동을 전개한다. 이 과정에서 한진중공업노조 박창수위원장이 옥중 의문사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 이에 민주노조 진영은 91년 경찰에 의한 강경대 타살사건과 함께 91년 5-6월 투쟁으로 떨쳐 일어난다.
⊙ ILO공대위
한편 91년 하반기 정부의 ILO가입을 계기로 전노협과 업종회의, 노동단체가 공동으로 노동법 개정을 위한 ILO기본권 조약비준 및 노동법 개정을 위한 전국노동조합 공동대책위원회'를 만든다. ILO공대위는 정권과 자본의 신종임금억제정책인 '총액임금제' 공세에 맞서 전국적인 공동대응을 위해 420여개 노조가 모여 총액임금제 분쇄 대책위원회를 꾸리고 정권과 자본의 노동운동에 대한 제도적, 정책적 탄압에 맞서 나갔다.
ILO 공대위는 전국노동자들의 노동법개정투쟁 결의를 모아내기 위하여 92년 전국노동자대회를 ILO가 포괄하지 못한 노동조합들까지 모아 공동으로 치루기로 한다. 그 결과 16개 지역과 14개 업종의 1,071개 노조 (조합원 40만명)가 되어 전국노동자대회에는 5만여 노동자가 참여한 가운데 성황리 개최되었다.
이날 대회에서는 '자주적 산별노조에 기초한 전국중앙 조직건설'이라는 공동의 조직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산별노조 건설과 민주노조 총단결 사업에 박차를 가할 것'을 공동의 과제로 천명하였다.
⊙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 (93.6.1)
정권과 자본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성장한 민주노조 진영은 1993년 92년 전국노동자대회조직위원회 성과를 바탕으로 임금인상, 노동법개정투쟁, 고용보장, 사회개혁투쟁등 전국 노동자들의 생존과 직결된 공동사안을 놓고 통일적인 대응과 함께 강력한 결집을 위해 단일한 대오가 필요하다는데 뜻을 모은다. 그 결과 전노협, 업종회의, 현총련, 대노협이 모여 1993년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를 구성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전노대는 노·경총의 사회적 합의 반대투쟁을 어용노총 해체 투쟁과 탈퇴운동으로 결합시켜 내면서 임금인상투쟁을 집중시켜 나간다. 이 시기는 민주노조의 조직 발전 모색, 준비하는 시기로서 민주노총, 산별조직 건설을 위한 조직발전 경로와 발전을 위한 논의가 집중된다.
⊙ 94년 11월 전국노동자대회에서 민주노총 준비위를 발족
94년 6월 [전국기관사협의회]소속 철도노동자들과 지하철노조의 연대투쟁은 '공기업 3% 임금억제정책 철폐, 근로기준법의 준수, "해고자 원직복직' 등 공동요구에 기초한 공동파업을 전개함으로써 업종별 공동투쟁의 새로운 모범을 보여 주었다.
전지협 연대파업투쟁은 부산의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LNG 선상파업투쟁, 광주의 금호타이어 노동자들의 파업투쟁, 대구의 대우기전 노동자들의 파업투쟁 등 각 지역별 대공장노조의 파업투쟁으로 이어져, 김영삼정권의 임금억제정책과 노사협조정책을 실력으로 무력화시켜 나갔다.
사무·전문직 노동자들은 '업종별 교섭', '사회개혁투쟁', '단일 산별노조의 건설 및 연맹의 합법화'라는 형태로 민주노조운동의 새로운 경험을 축적시켜 나갔다. 병원노련과 전문노련은 기업별 노조체계 하에서 집단교섭을 성사시킴으로 업종별 공동투쟁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며, 전국과학기술노조, 전국의료보험노조 등은 단일 산별노조(소산별)를 건설하고, 합법성을 쟁취함으로써 산별노조 건설의 전망과 가능성을 현실로 보여주었다.
사무 전문직 민주노조운동의 경우, 의료제도의 개선, 완전한 사회보장의 실시, 언론 민주화 등 사회개혁 요구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서 노동조합의 사회적인 역할을 부각시키고, 노동자의 정치의식을 고양시켜 나갔다.
94년, 공공부문 노동조합운동이 활성화되었다. 그 동안 정부의 임금 가이드라인 정책의 선도사업장으로 정부의 임금통제정책의 희생양이 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공공부문'이라는 이유로 노동3권마저 심각하게 제약 당해 왔던 공공부문 노동자들은 94년 상반기 철도노동자들의 연대투쟁을 출발로 한국통신 노동조합의 민주화, 조폐공사 노조의 파업투쟁 등을 계기로 공공부문에서의 민주노조운동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마침내 11월 4일에 142개 노조, 21만 조합원을 포괄하는 [공공부문노조 대표자회의]를 결성하였다.
87년 이후 민주노조운동을 통해 성장한 수천의 대중 지도력과 대중적인 공동투쟁의 경험, 계급의식의 발전은 새로운 형태의 단결을 요구하였다. 더구나 민주노조 사수 투쟁이라는 방어적인 투쟁과 시기집중에만 머무는 소극적인 전술을 뛰어넘어 총자본과 총노동의 대립을 실질적인 투쟁 전선으로 전화시켜 내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기업별 노조의 틀로는 더 이상의 계급적인 단결과 공동투쟁을 조직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한편 대중적인 어용노총 탈퇴운동은 민주노조운동이 명실상부하게 노동조합운동의 조직적 구심으로 서 나갈 것을 요구하였다. 94년 11월 13일, [민주노총 준비위]는 이러한 배경에서 출범하였다.
⊙ 민주노총 건설
민주노총준비위원회를 발족 1년 만인 1995년 마침내 생산직과 사무직, 대기업과 중소기업, 공공부문과 민간기업을 망라하여 15개 산업별(업종) 조직과 8백 61개 노조, 조합원 41만 8천 154명으로 산별노조 건설의 견인차가 될 민주노총을 건설한다.
민주노총 건설의 역사적 의의
- 민주노총의 출범은 무엇보다도 87년 이후 한국노동조합운동사에서 한국노총에 반대하는 민주노조운동노선이 정권과 자본의 탄압을 뚫고 승리를 쟁취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 또한 민주노총은 노동조합운동의 '질적인 전환을 준비하는 조직적 구심체'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다. 노동조합운동의 질적인 전환이란 자본과 정권의 노동통제수단인 기업별 노동조합체계를 극복하고 산업별 노조건설을 위한 구심체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 현재 60만이 넘는 조합원을 아우르고 있는 민주노총은 이제 이 사회에서 명실상부한 대안세력으로의 등장했다는 것이다. 즉 이 사회 전체의 근본적인 변혁을 실질적으로 수행해 나갈 수 있는 주체로서 성장을 요구받고 있다.
<표5> 민주노총 소속 노동조합 연도별 조직현황
주) 2001년도 조직현황은 노조수가 아닌 사업장수로 대신함
5. 신자유주의 공세와 노동자투쟁
1) 90년대 초 신경영전략 - 96년 노동법 개악 - 98년 신자유주의
87년 노동자투쟁 직후에 폭발적인 노동자파업에 놀란 자본가들은 노동시간단축이나 임금인상으로 노동자의 요구를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저임금·장시간 노동에 기초한 자본축적체계의 변화를 모색해 나갔다.
90년대 이후 본격화되는 자본의 세계적 경쟁 속에서 저임금·장시간 노동에 기초한 기존의 자본축적은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었고, 국내 독점자본의 생존을 위한 자본축적체제의 변화는 불가피했다. 파업투쟁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들의 저항은 이 변화과정을 단축시킬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자본축적체제의 변화는 90년대 초 노태우 정권에서 시작하여 김영삼 정권의 세계화 구상, 그리고 IMF경제위기를 계기로 김대중 정권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으로 완성됐다. 자본가들은 기존의 병영적·가부장적 노무관리로는 더 이상 노동자계급을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없게 되자, 새로운 노동통제전략을 모색해 나갔다. 그것이 1990년대 초 민간대기업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던 '신경영전략'이다. 현장통제 강화와 기업문화를 통한 노동자 포섭을 핵심 내용으로 하는 '신경영전략'은 이후 총자본차원에서 수렴되면서 김영삼 정권은 '신노사관계'에 따른 '노사관계개혁위원회'로 실험했으나 노동법 개악에 저항하는 96∼97총파업으로 좌절되었고, 이후 김대중 정권에 이르러서는 '노사정위원회'와 '신노사문화'로 구체화되고 고도화되어갔다. 김대중 정권은 IMF경제위기를 빌미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공세를 전면화, 일상화, 제도화하고 있다.
2) 96-97년 노동법개악 저지 노동자총파업 투쟁
김영삼 정권의 '노사관계위원회'와 '신노사관계', 노동법 개악 정책은 97년 대선에서의 정권재창출을 위한 정국주도권 장악 음모 속에 1996년 12월 26일 정리해고법을 핵심으로 한 노동법과 안기부법 날치기 통과를 강행했다.
이에 맞서 민주노총은 12월 26일 민주노총 총파업 투쟁을 선언하고 전국적 총파업 투쟁으로 맞섰다, 3단계에 이르는 끈질긴 투쟁 끝에 1997. 3. 국회에서 노동악법 재개정되어 통과된다. 이러한 파업 투쟁이 가능했던 것은 '정리해고'에 대한 법적 제도화에 대한 노동자들의 높은 위기 의식과 이러한 위기의식을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모아냈기 때문에 가능했었다.
또한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대중투쟁동력으로 확산 된 이 투쟁은 노동자 투쟁에만 머물지 않고 민족주의 세력 결집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96-97년 노동자총파업투쟁의 역사적 의의
- 파업참가 누적규모가 3,206개 노조, 359만7,011명에 이르는,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정치총파업이었다.
- '노동악법 전면무효화'라는 정치적 요구를 중심으로 전체 노동자의 이해와 단사별, 지역별, 업종별, 산업별 이해를 일치시켜 전국총파업 투쟁이었다.
- 96∼97년 총파업투쟁은 "실질적 민주주의(사회·경제적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와 정치적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를 결합시킨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투쟁으로서 기존의 민주주의투쟁과는 다른 성격을 띠고 있다.
- 87년 6월 민중항쟁에서 소위 넥타이부대라 일컬어지는 사무전문직 노동자들의 경우 하나의 '시민'으로 민주주의투쟁에 참여했지만, 96-97총파업투쟁에서는 투쟁의 주체로서 조직적으로 투쟁에 나섰다.
- 투쟁의 형태에서도 "민주노총의 조직적인 준비를 통한 총파업투쟁이 중심이 되어 가두 집회와 시위를 결합하고, 이를 노동자들이 중심에서 주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투쟁모습을 보여 준 신자유주의에 맞선 정치총파업 이었다.
3) 신자유주의 공세 속, 노동자 투쟁
1997년 IMF구제금융이라는 국가부도 위기를 맞이했다. 그로부터 5년여, IMF 구제금융을 조기 졸업하겠다던 김대중 정권의 약속은 구조조정과, 정리해고, 비정규직과 실업자 양산이라는 화살이 되어 돌아왔다.
김대중 정부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정책은 노동, 기업, 금융, 공공부문으로 종횡무진 이어졌다. 그 결과 초국적 자본에게는 모든 자유를 보장하고, 노동자들에게는 생존권 말살과 극심한 현장통제, 노동강도 강화를 가져다 주었다.
또한 한 손에는 노동유연화, 임금유연화의 칼날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노동자 감시와 통제라는 칼날을 들고 구조조정이라는 거대한 몸집으로 무장하여 노동기본권은 물론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벼랑으로,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그렇게 IMF와 IMF의 충실한 심복 김대중 정권은 노동자들이 수년간 투쟁을 통해 쟁취한 성과물을 빼앗아 가고 있다.
그 과정에서 노사정 위원회는 노동자들을 배재시키고, 노동자들을 구조조정 대상으로 삼아 정부, 자본의 구미에 맞게 구조조정을 완성하는데 철저히 복무하였다. 결국 노사정위원회는 사회적 합의 모델을 만들어 보겠다던 취지는 간데 없고 노동기본권 마저 인정하지 않으려는 정부, 자본의 탐욕 앞에 순종하고 만 것이다.
민주노총은 97년 11월 IMF 외환위기 이후, 김대중 정권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공세와 노사정위원회를 중심으로 하는 허구적인 사회적 합의전략에 맞서 총파업과 총력투쟁으로 완강히 맞서왔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에도 불구하고 지난 국가기간산업 사유화 저지를 위한 4월 2일 파업철회 과정에서 드러났듯 치열한 투쟁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맞선 민주노총의 대응과 투쟁은 많은 한계와 과제를 드러내고 있다. .
- 1997년 11월 IMF 경제위기
- 1998년 5월 총파업투쟁
- 1998년 9월 현대자동차 정리해고저지 파업투쟁 / 10월 만도기계노조 파업
- 1999년 민주노총 총력투쟁
- 1999년 4월 서울지하철 파업투쟁
- 1999년 10월 한라중공업노조 파업
- 2000년 3-4월 자동차3사 노조 연대파업
- 2000년 12월 금융노동자파업, 한국통신노동자 파업
- 2001년 2월 대우자동차 노조 정리해고저지 파업투쟁
- 2002년 공공3사 공동파업과 발전노조 투쟁
6. 마치며...역사는 동지들에게 묻는다.
70년대 이후 노동운동사는 "나는 그때 거기서 무엇을 했었는가?" 또한 "지금 여기어 어떻게 살아가고 잇는가?"를 자꾸 되묻게 한다. "그때 거기"는 우리들에게 있어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이며 나의 삶과 동일선상에 있는 사건이자, 역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걷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노동운동 역사를 만드는 것이고, 우리가 밟아 가는 길이 우리 사회가 나가는 길"이라고 할 때 70년대 이후 역사 속에는 바로 내가 있었지 않았던가?
다름 아닌 우리가 "그때 거기"에 있었고 "지금 여기서"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임을 되새기며 역사의 물음에 귀 기울이자.
1) 굳건히 연대하고 있는가?
지난 투쟁 과정은 노동자 계급의 연대와 단결의 역사였다. 중소영세.대공장 없이, 여성.남성 없이, 정규직.비정규직 없이, 사무직.제조업 없이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단결하고 연대해 왔다.
그러나 갈수록 정부, 자본은 노동자와 노동자 사이에 금을 긋고 벽을 만들어 놓으며 단결과 연대를 가로막고 있다. 노동자 계급이 연대 할 때 만이 전 민중의 연대투쟁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2) 노조간부로서 이념과 사상을 정립하고 있는가?
혹독한 탄압, 노동자라는 이름마저 꺼내기 힘들었던 시절을 뛰어 넘어 오늘날의 역사발전이 있기까지 이론과 실천으로 무장한 활동가, 선진노동자들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이념과 사상이 있었기에 모진 고문과 탄압을 견딜 수 있었고, 역사를 내다보는 계급적 안목이 있었기에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오늘날 민주노조를 하는 동지들은 무슨 생각을 갖고 민주노조 운동에 복무하고 있는가? 정부, 자본과 싸워 맞설 이념과 사상의 무기는 준비되어 있는가?
3) 끊임없이 조직하고 있는가?
혹독한 탄압의 시기에는 숨죽여 조직했고, 민주노조 꽃피는 시절에는 민주노조로 단결하여 조직활동의 꽃을 피웠다. 항상 조직하고 실천 할 줄 아는 조직만이 희망이 있을 수 있다. 노동조합 간부의 기본책임은 조직이다. 현재에 안주하지 말고, 끊임없이 나아가 조직하자.
내가 살아가는 이 시대, 역사에 대하여.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를 돌아본다는 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우리는 박정희로부터 시작하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정권으로 이어지는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동시대인이다. 그러나 같은 시대를 살고, 똑같은 사건을 경험하면서도 역사에 대한 기억과 해석은 각양각색이다.
6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역사는 독재정권으로부터 시작하여 신자유주의 정권으로 이어지는 과정이었으며 이에 맞선 노동자, 민중의 투쟁이 함께 한 역사였다.
노동자, 민중을 향한 정권의 총칼이 있었는가 하면, 경제개발을 향한 장밋빛 환상이 있었고, 무수한 이데올로기가 있었다. 그 속에서 노동자, 민중은 때로는 짓눌리고, 때로는 체념하기도 했지만 불굴의 저항으로 노동자, 민중의 역사를 도도하게 써내려 왔다.
이 시간을 통해 나는 내가 경험한 시대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며 살아 왔는가 생각해 보자. 만일 달리 이해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왜 그런 것인지 새겨보며 내가 살아왔고 살아 갈 이 시대 속에서 노동자의 올바른 역사관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도록 하자.
1. 70년대 정치, 사회, 경제상황과 노동자들의 삶
1) 박정희 정권의 폭압적인 등장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를 필두로 서울을 점령한 군사쿠테타 세력에 의해 4.19 혁명의 변혁 열기는 단숨에 식어 버렸다. 박정희는 '반공'과 '재건'을 내세워 모든 노동조합과 정당, 사회단체를 해체하고 폭압적인 독재체제를 완성시켜 나갔다. 군복을 민간복으로 갈아 입고 장기집권에 나선 박정희는 굴욕적인 한일협정, 미국 주도 경제체계로 편입, 각종악법을 내세워 민주세력을 탄압함과 동시에 자시의 정치 기반을 다져갔다.
군사정부는 일체의 쟁의를 금지시키고 5월 23일부로 모든 정당과 사회단체를 강제해산 시켰다. 이 과정에서 한국노련, 교원노조 등 노동단체가 해체 당한다. 그리고 군사정부에 의해 노동조합이 재조직되기 시작했다. 군사정권은 신고제였던 노조 설립을 허가제로 바꾸고 9명으로 구성 된 재건조직위원회를 만들어 노조를 만들어 갔다. 노조는 중앙집권적 산별노조체계였는데 군부는 산별노조에 노동자 통제권을 부여하고 이를 통해 노동조합을 일사불란하게 장악하겠다는 음모를 드러냈다. 재건조직위는 1961년 8월 30일, 12개 산별을 일사천리로 결성하고 한국노총을 출범시켰다.
한국노총은 "군사혁명의 성스러운 봉화를 선두로 국가재건에 전력을 다한다"는 선언을 채택하고 정치적 중립을 표방함으로 노동조합의 정치활동을 스스로 포기한다.
2) 친미와 친일, 구조적 정경유착으로 얼룩진 경제개발정책
박정희는 "혁명은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재건이다. 기업인들이 앞장서 경제재건에 나서달라"며 경제성장을 재촉했다. 그러나 한국의 경제개발정책은 미국과 일본에 전적으로 의존해 진행됐다.
2차 대전 뒤 강대국으로 떠오른 미국은 후진국 경제를 발전시켜 제3세계 민족주의를 희석시키고 사회주의세력의 확장을 막으려 했다. 한국은 소련, 중국, 북한 등 공산주의 세력과 전선을 맞댄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에 미국은 한국경제를 근대화이론의 성공적인 모델로 만들려는 야심찬 계획으로 한국경제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1962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국내자금조달로 실패하자 1963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외자에 의존한 경제개발 계획을 새로 마련했다.
그리고 일본과는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을 체결, 식민지 통치에 대한 아무런 사과와 보상도 받지 못한 채 몇 푼의 차관과 정치자금만으로 국교를 정상화시켜 버렸다.
또한 박정희 정권의 수출드라이브 정책은 수출만 한다하면 기업들에게 돈과 온갖 특혜를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럴수록 정경유착은 구조적으로 뿌리 깊이 내려갔다. 그 결과 경제적으로는 자본축적 방식을 종속적으로 재편해 나갔으며, 친미와 반공을 앞세워 진보세력과 노동계급의 저항을 통제하는 독재정권의 표본이 되어갔다.
3) '한강의 기적' 속 '선성장 후분배' 노동착취
박정희 정권은 독점자본을 지원하면서 저임금, 저곡가 정책을 강력히 밀고 나갔다. 경공업 중심의 수출산업화 정책은 '선성장 후분배' 논리 속에 가혹한 노동착취만을 강화했다. 즉 '중단없는 전진'을 외친 박정희의 경제정책은 정치발전이나 삶의 질을 무시한 채 오로지 경제성장만 최우선 과제로 삼았던 것이다.
60년대에 시작한 경제개발계획으로 우리나라 경제는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외형적 성장을 가져왔다. 국민소득은 연평균 8.7% 성장률을 보였으며, 수입은 62년 4억 2천 달러에서 72년 24억 달러로, 수출은 5,500만 달러에서 11억 달러로 대폭 증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외형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물가는 연평균 13.4%나 올랐다. 반면 임금은 60년대 연평균 3.6%, 70년대 초는 2% 남짓 올라 노동자들은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노동시간도 1963년 50시간에서 1969년에는 주당 57.2시간으로 늘어나는 등 극도의 노동착취가 이어졌다.
경제발전이라는 장미빛 환상 속에서 빚더미에 앉은 농민들은 1970년대 초까지 해마다 50만명씩 대도시로 몰려가 빈민가를 형성하고 극빈자 생활을 해야만 했고, 노동자들은 저임금, 장시간 노동 속에서 '한강의 기적'을 위해 '산업역군'이라는 미명 아래 기계처럼 일해야만 했다.
< 생계비와 임금 비교 / (제조업) >
청계피복노동자 임금실태(1970년): 재단사(1,200명/5%) 30,300원, 미싱사(1,200명) 15,000원, 시다(1,200명) 3,000원
2. 70년대 노동자 투쟁 - '전태일에서 김경숙까지'
1)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전태일 정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노동자도 인간이다!"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을 품에 안은 채 불길에 휩싸여 절규하는 전태일의 외침은 군사독재정권 아래 잠자던 양심을 깨우고 70년대 노동운동에 불길을 당겼다.
22살 청춘을 불사른 전태일은 평화시장 재단사였다.
1964년 16살 나이에 시다로 평화시장에 첫발을 내 딛은 전태일의 가슴은 새로운 희망과 꿈으로 부풀었다. 한달 월급 1,500원, 일당 50원, 14시간 노동에 하루 일당이 커피한잔 값밖에 안 되는 기막힌 저임금이었다. 그러나 전태일의 머리 속은 주어진 여건 속에 열심히 일하여 셋방 한칸이라도 얻고 식모살이 하는 어머니와 길바닥에 버려진 막내 순덕이를 데려와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찼다.
1967년 2월 전태일은 그리도 바라던 재단사가 되었다. 그런던 어느날 한 미싱사 처녀가 일을 하다가 새빨간 피를 재봉틀 위에 왈칵 토해냈다. 전태일은 급히 돈을 걷어 병원에 데려가 보니 폐병 3기라고 했다. 직업병이었지만 그녀는 해고당하고 말았다.
그 일로 크게 충격 받은 전태일의 생각에 큰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죽어 가는 저 여공들을 살리자. 우리의 건강과 생명을 갉아먹고 삶의 모든 기쁨과 보람을 빼앗아가며 우리를 비정한 현실의 쓰레기로 만드는 저 잔인한 노동조건을 내 힘으로 바꾸어 보자.' 는 것이었다.
전태일은 아버지로부터 근로기준법이라는 것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근로기준법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근로기준법에는 하루 8시간 노동, 1주 1일 유급휴일이 정해져 있었고 유해위험 작업에 관한 규정, 여공에 대한 유급생리휴가, 여자와 18세 미만 연소 근로자의 야간 작업 금지, 건강진단, 재해보상 등 놀라운 사실들이 있었다. 전태일은 이렇게 좋은 법이 있는 줄도 모른 채 찍소리 못하고 살아온 자신이 너무나도 '바보' 같았다.
전태일은 재단사들의 모임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모임 이름을 '바보회'로 정했다.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며 동료들과 근로조건 개선 의지를 갖게 됐고 주위 친구들이나 여공들에게 기회가 있는 대로 근로기준법을 설명했다. 이때 전태일은 법학도를 상대로 만든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며 '내게 대학생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하고 안타까워 한다. 갈수록 바보회 회원들이 늘어났고 그들의 활동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도 많아졌다. 그러자 전태일은 '위험분자'로 찍혀 일터에서 쫒겨 나고 만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전태일은 '바보회' 회원들과 함께 노동실태조사에 나선다. 설문지를 300부 인쇄하여 100부 정도 배포한 가운데서도 30부 밖에 수거하지 못했지만 전태일은 설문지를 분석, 집계하여 이를 근거로 근로기준법상의 감독권행사를 요구하기 위해 시청, 근로감독관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돌아 온 것은 싸늘한 무관심 뿐 이었다. 갈수록 전태일은 가족에 대한 죄책감, 실직자로서 우울함과 불안, 생계의 어려움, 바보회의 파탄, 사회의 무관심, 두꺼운 현실의 벽 등으로 인해 죽음과도 같은 시련을 맞아야 했다. 결국 전태일은 평화시장을 등지고 삼각산 공사판으로 나갔다. 그곳에서 전태일은 끝내 저버리지 못한 결단을 한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 어린 동심 곁으로.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1970년 8월 일기)
1970년 9월 다시 평화시장으로 돌아온 전태일은 겨우 취직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다시 재단사들을 모아 '삼동친목회'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이때를 전후하여 전태일은 틈나는 대로 시청, 노동청을 찾아다니며 진정을 내고 신문기자를 만나거나 방송국을 찾아다니며 평화시장 노동실태를 보도해 달라고 매달렸다.
삼동친목회는 평화시장 노동자를 대상으로 또다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126매 설문지가 성공적으로 회수되어 그 결과를 모아 노동청장 앞으로 '평화시장 피복 제품상 종업원 근로개선 진정서'를 냈다. 다음날 10월 7일, 각 석간신문에 평화시장 참상이 보도되었다. 삼동친목회 회원들은 손목시계를 담보로 맡기고 신문을 사들여 평화시장으로 달려가 배포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의 반응은 아주 놀라왔다. 평화시장 일대는 축제분위기로 넘쳤고 군데군데 노동자들이 모여 신문을 돌려보고 웅성이기 시작했다.
10월 8일, 전태일 등 3명은 삼동회를 대표하여 작업시간 단축, 1주 1일 휴일, 1년 2회 건강검진, 시다 임금 100%인상, 여성 생리휴가 보장, 노조결성 지원 등 내용을 담은 건의서를 평화시장 주식회사에 제출했다. 평화시장이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기업주와 정부당국은 당황했고 대통령선거를 앞둔 시기라 당국은 여론동향에 민감했다. 노동청에서는 근로조건을 개선시켜 주겠다며 삼동회 회원들을 회유했다. 말로써 해결이 안되자 삼동회는 노동청 국정감사가 있는 날을 택해 데모를 하기로 했다. 이를 눈치 챈 근로감독관은 전태일을 찾아 와 근로조건을 약속대로 개선하겠다고 약속하며 데모를 중지할 것을 요구했다. 일단 기다려 보기로 하고 데모를 보류했으나 국정감사가 끝나자 언제 그런말 했느냐는 듯이 시치미를 뗐다.
격분한 삼동회 회원들은 10월 24일 오후 1시 다시 데모를 감행키로 결의했다. 그러나 경비원과 사복경찰의 삼엄한 경비와 감시로 성사시키지 못했다. 경찰과 회사는 11월 7일까지 기다려 보라고 회유했다. 그러나 약속날짜가 되었건만 아무것도 지켜지지 않았다. 전태일은 회원들에게 몹시 심각한 표정으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하자고 제의하며 모두 희생 할 각오로 싸우자고 말했다.
마침내 11월 13일 오후 1시, 그날은 아침부터 옅은 잿빛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었다. 경찰과 경비원들의 저지를 뚫고 삽시간에 500여명이 국민은행 앞길에 모여들었다.
그때 갑자기 불길을 뒤집어 청년하나가 나타났다. 그는 몇마디 구호를 짐승처럼 외치다가 그 자리에 쓰러졌다. 바로 전태일이었다.
병원으로 옮겨진 전태일은 친구들에게 "부모에게 효도할 것과 자신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 것"을 당부하면서 대답을 요구했다. 대답이 없자 태일은 벌떡 일어나려 하면서 "왜 대답이 없는가?"하고 크게 외쳤다. 놀란 친구들은 "네 말대로 꼭 하겠다."고 약속했다. 전태일은 친구들에게 거듭 맹세할 것을 약속 받으며 눈을 감았다.
전태일의 죽음은 비인간적 노동착취와 빈곤에 맞선 인간선언이자 노동자로서 최소한의 권리를 찾기 몸부림이었다. 전태일은 노동자가 이윤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인간대접을 받고, 노동이 즐거운 세상을 위해 온몸 바쳐 죽어갔다. 하지만 그는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영원한 노동자 전태일'은 한 점 불꽃으로 사라졌지만 전태일 정신은 우리 가슴에 살아 투쟁으로 되살아 나고 있다.
2) 독재를 넘고, 어용을 넘어 피어나는 민주노조 운동
전태일의 장례식이 거행되고 2주일 뒤인 11월 27일, 연합노조 청계피복 지부가 결성됐다. 청계피복 노동자 투쟁은 70년대 노동자 투쟁의 발원지였으며 청계피복 지부는 70년대 최초의 민주노조가 됐다. 이 투쟁을 계기로 노동자 투쟁이 곳곳에서 폭발하기 시작했고 민주노조 건설과 어용노조 민주화 투쟁이 이어졌다.
또한 전태일의 분신은 사회적으로도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이 사건을 계기로 종교계, 지식인들이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이들의 투쟁은 70년대 내내 이어진다.
1969년 3선 개헌안을 날치기 통과시키고 1971년 선거에서 간신히 이긴 박정희는 1971년 12월 비상사태를 선포,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한다. 그리고 집회, 데모, 노동자의 단체행동권을 전면 제한하고 대통령은 초헌법적인 비상대권을 갖는다.
또한 1972년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국정조사활동 중인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의 정치활동을 금지시키는 한편, 비상국민회의가 국무회의와 국회의 입법기능을 떠맡도록 하면서 10월 유신을 단행했다.(대통령임기 4년에서 6년으로, 중임제한 예고를 없애고 간접 선거제로 전환)
박정희는 경제개발과 새마을운동을 주요 지배이데올로기 삼아 민중의 거센 반대 속에서도 9차례에 걸친 긴급조치로 국민기본권을 박탈하고 극도의 탄압을 일삼았다. 그 속에서 유신반대 투쟁은 갈수록 격화되어 갔다.
또한 태생적으로 정부의 영향력 아래 있을 수밖에 없었던 한국노총은 1970년대 들어 60년대 전개했던 최소한의 투쟁마저 저버린 채 그 어용성을 더욱 노골화했다. 유신반대 투쟁과 미조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확산되고 있을 때 유신체제 전면지지와 노사협조를 선언했다. 또 노동자의 단결 된 힘을 바탕으로 하는 노조운동을 포기하고 반공주의를 앞세우며 정부와 기업에 대화, 건의, 진정하는 방식을 택했다. 심지어 '연도별 쟁의현황' '연도별 쟁의행위 현황' 마저도 노사협조주의에 배치된다고 생각하여 중단했고 오히려 하부조직 탄압, 부패, 비민주화를 일삼았다.
" ....우리는 국가 이익 우선주의 법에 입각하여 .....임금인상 일변도의 활동노선을 지양하고 생산성향상 운동을 통한 분배원천의 증대라는 노사공동의 이익의 영역을 찾아 서로 협력하는 보다 건전한 기업풍토를 이룩할 수 있는 새로운 제도를 마련하는데 최선을 다 하려는 것이다....."
(1973년 한국노총의 운동방침)
그러나 군사정권과 한국노총의 어용성 아래서도 노동자들의 투쟁은 (광산노조, 철도노조, 조선공사, 증권거래소, 주한미군내 노동자투쟁등)끊이지 않았다. 특히 전태일의 분신 이후 노동자 투쟁이 잇따라 1969년 130건이던 노동자 투쟁이 1970년 165건, 1971년 1,656건으로 크게 늘어났고 민주노조운동이 꽃피기 시작했다. 1970년부터 79년까지 모두 2,500개의 노조가 만들어 졌다.
3) 동일방직 노동조합 수호 투쟁
1970년대 초반이 민주노조 건설과 민주화를 통해 노동운동 주체가 바뀌는 시기였다면 70년대 중반은 정부와 자본, 심지어 상급노조에 의한 민주노조 파괴에 맞서 대항하는 노동조합 수호 투쟁 괴정이라 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동일방직 1,2차 조직수호 투쟁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 노동자 투쟁의 또다른 특징은 중요 노동자 투쟁이 정치쟁점으로 부각되면서 반정부 투쟁 성격을 띠고 사회여론화 되었다는 것이다.
제1차 투쟁 조직수호 투쟁 : 알몸시위 (76.7)
1966년 부터 갖기 시작한 인천도시산업선교회의 소그룹 활동이 결실을 맺으면서 1972년 2월 동일방직에 주길자 집행부가 들어 서면서 노조민주화 기운이 싹트기 시작했다. 순조로운 과정을 거쳐 75년 이영숙 지부장을 선출하며 조직기반을 다져나갔다.
그러나 관계당국과 결탁한 노조파괴 공작으로 76년 들어 서면서 시련을 맞게 됐다. 회사는 2월 대의원 선거에 노골적으로 개입하고, 4월 3일 대의원대회마저도 남자대의원 5명을 동원하여 무산시켜 버렸다. 그리고 7월 23일 관계기관의 비호를 받으며 고두영 등 회사측 대의원만 참석하는 대의원대회를 개최했다. 경찰은 순조로운 진행을 위해 지부장 등 노조간부 10여명을 연행하고 조합원들이 대회에 참석하는 것을 막기 위해 기숙사에 못질을 하고 현장 문을 잠가 버렸다.
결국 고두영 측 대의원만 참석하여 고두영을 지부장으로 선출했다. 이에 격분한 노동자들은 밤 10시 퇴근반 부터 '지부장 석방과 노조활동 보장, 대의원대회 무효' 등을 주장하며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그러자 회사는 물과 전기를 끊고 화장실 문을 잠가버리고 음식 반입마저 금지시켰다. 다음날, 7월의 뜨거운 태양아래 노동자들은 허기에 지쳐 쓰러져 갔다. 저녁 6시 반, 기동 경찰이 연행 버스를 대기시키고 방망이를 들고 여성노동자들을 포위해 들어오며 5분간 시간을 줄테니 해산하라고 경고했다.
이때 놀랄만한 일이 벌어졌다. 여성노동자들은 작업복을 벗어 던지고 노총가를 목이 터져라 불러댔다. 아무리 비열한 경찰일지라도 반나체 여성의 몸에 손을 대지는 않으리라 믿은 이들은 여성의 수치마저 잊은 채 절규했다. 그러나 경찰의 무자비한 연행이 시작됐다. 곤봉이 난무하고 가냘픈 여성노동자들은 피를 흘리며 신음했다. 어떤 노동자는 죽어도 노동조합을 사수하겠다고 속옷마저 팽개쳤지만 경찰은 나체 그대로 연행해 갔다. 차바퀴에 누워 저지하려 애썼지만 머리채 잡혀가며 몽둥이로 얻어 맞고 끌려가는 상황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이 사태로 72명이 연행, 50명이 충격으로 졸도, 70명이 부상, 14명이 병원에 입원했다.
이러한 강제헤산에도 불구하고 여성노동자 투쟁은 더욱 높아가 26일에는 서울 섬유노조 본조로 30명이 몰려가 연행노동자 석방을 요구했다. 그 결과 연행자들이 석방됐다. 일주일 뒤 본조에서 수습대책 위원장이 내려왔으나 회사와 공모하여 노조를 파괴하려 했다. 이에 노동자들은 사회양심세력과 연대하여 사건 해부식을 명동카톨릭회관에서 갖기로 했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요구조건이 모두 들어 지면서 처절했던 알몸시위는 승리로 끝났다.
제2차 노동조합 수호투쟁 : 똥물사건 (78.2)
1978년 섬유노조 대의원대회에서 섬유노조 산하 분회나 지부는 본조에서 사고지부로 규정지으면 일체의 업무를 본조에 인계한다는 내용의 규약을 개정했다. 그리고 한국노총 내 <근로환경 개선 대책위>를 구성하고 그 산하에 조직행동대를 편성했다. 그것은 도시산업선교회등 종교단체와 관련있는 민주노조를 파괴하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다.
동일방직 노조 집행부는 78년 정기총회를 2월 중에 열기로 하고 2월 21일 78년 총회를 위한 대의원 선거를 실시하였다. 새벽 5시 50분, 아침반으로 출근하는 조합원들이 회사정문에 들어서자 노조사무실에서 기물부수는 소리와 비명소리로 시끄러웠다. 40여개 투표함이 다 부서지고 아수라장이 된 노조사무실에 회사의 조종을 받은 남자 5-6명이 방화수 통에 똥을 담아 가지고 고무장갑 낀 손으로 선거하러 오는 여성조합원들의 얼굴과 옷에 닥치는 대로 똥을 발랐다. 회사가 지지하는 지부장 후보 박복례는 '저년에게 먹여라' 지시했고 남자들은 똥을 여성노동자들의 입에다 바르고 젖가슴에까지 쑤셔 넣었다. 심지어는 기숙사로 도망간 조합원 머리에 똥바께스를 뒤집어 씌우기까지 했다. 구경만하고 있는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하니 욕설만 퍼부어 댔다, 한시간 뒤 섬유노조 조직행동대가 나타나 노조를 돕기는 커녕 노조를 강점하고 대회를 방해했다.
오후 1시경 대회를 치루지 못한 노동자들이 삽시간에 500여명이 모여 농성을 시작했다. 그러나 한겨울에 작업복 하나 걸치고 농성하는 노동자들을 100여명의 경찰기동대가 에워싸고 강제해산 시켰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섬유노조에서는 동일방직 노조를 사고 지부로 규정하고 집행부를 해산시키고 일체를 접수하려했다. 그리고 동일방직 지부 의장단전원을 제명하고 이에 반항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위원장 임의로 조치를 취해도 좋다는 전권을 위임했다.
이에맞서 동일방직 노조는 노동조합 수호를 위해 국무총리가 참석한 노동절 행사장에서 '노동귀족 물러가라!' 외치며 시위를 했고, 명동성당, 답동성당, 기독교회관 등에서 단식농성을 전개했다. 이에 호응하여 인천산선 조화순목사 등 67명이 동조단식에 들어갔고 동아자유언론수호 기자들도 단식에 들어갔다. 김수환 추기경도 정부와 노총에 강력히 항의하고 3월 21일 민주인사와 단체로 구성 된 <동일방직사건 긴급 대책위원회>가 구성됐다. 사회 각계각층의 완강한 투쟁에 부딪히자 정부는 종교계와 협상을 통해 요구조건을 수락했다. 그러나 회사는 농성을 풀고 복귀한 124명을 해고했고 섬유노조 본조는 이들 명단을 적은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전국 사업장에 배포하여 이들의 취업을 원천적으로 가로막았다. 이때부터 동일방직 노동자들은 80년 5월까지 줄기차게 현장복귀 투쟁을 벌인다.
이 시기 노동조합 탄압은 정치권력과 한국노총, 기업주가 결탁하여 조직적, 폭력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조직적인 노조파괴 공작에 맞서 당시 민주노조들은 치열하게 투쟁했고 민주세력과 연합하면서 대정부 투쟁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이러한 투쟁들이 모두 노동조합들의 연대투쟁과 조직건설로 발전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70년대는 전국 혹은 지방조직이 주도하는 노동운동이 없었던 유일한 시기로 역사에 남는다. 일제시대에는 조선노동총동맹이, 해방정국에서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가, 1950-60년대는 대한노총(60년대 한국노총)이 당대의 투쟁을 이끌었지만 70년대는 소위 민주노조라 불리는 개별노조와 미조직 노동자들의 자연발생적인 투쟁이 주를 이루었다.
4) YH노동자 김경숙의 죽음과 유신체제 붕괴
회사설립 4년 만에 종업원 4,000여명의 국내 최대가발업체로 성장한 YH무역은 가발산업의 사양화, 경영부실, 재산해외 도피 등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79년 3월 일방적으로 폐업한다. 노조는 '공장폐쇄는 근로자들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비인도적인 처사이고 몇 사람만을 위한 사기극'이라면서 농성투쟁을 벌였다. 투쟁기세에 밀려 잠잠하던 회사는 7월 들어 폐업책동을 벌이다 8월 6일 다시 폐업공고하고 기숙사 폐쇄, 퇴직금, 해고수당 수령하라고 최후통첩 했다.
이에맞서 YH무역 노동자 170여명은 '회사를 정상가동하고 생존권을 보장하라!'며 신민당사에 들어가 밤샘농성을 벌인다. 그러자 박정희 정권은 경찰 2,000여명을 신민당사에 투입하여 강제해산 시키는데 잔혹한 진압과정에서 스물한살 여성노동자 김경숙이 목숨을 잃고 만다. 이어서 노조 지부장등 간부와 종교인, 재야인사 등을 구속했다.
이 사건을 계기 독재타도를 외치는 농성과 시위가 잇따랐다. 그 와중에 박정희는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의 당총재 자격과 의원직을 빼앗으며 정치적 탄압을 가하고 이에 맞서 신민당의원 전원이 의원직을 사퇴한다. YH사건 여파는 학생운동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10월 16일 부산대 학생들의 시위가 도시 한복판에 일어나자 수만의 민중이 모여 '독재타도'를 외쳤다. 다음날은 동아대 학생들의 시위로 이어지며 '독재타도' 열기를 달구어 갔다. 그러자 박정권은 10월 18일 부산에 계엄령발표, 20일에는 마산, 창원에 위수령을 내리고 군을 투입했다.
그러나 그 치열했던 투쟁(부마항쟁)은 지배층 안의 분열을 촉진시켜 유신체제의 몰락을 가져오는 계기가 됐다. 10월 26일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저격으로 시해. 마침내 기나긴 유신체제는 무너지고 만다.
결국 YH 노동자 투쟁은 60년대 이후 한국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누적돼 온 사회적 모순이 첨예한 형태로 폭발한 투쟁이자, 유신체제 붕괴의 도화선이 됐던 것이다.
<1970년대 쟁의현황>
70년대 노동자 투쟁의 특징과 역사적 의의
- 노동자의 생활과 근로조건, 사회분위기가 극도로 열악했던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은 자연발생적 분규와 폭동으로 발전했으며 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양상으로 나타났다. (광주대단지 사건, 현대조선소 폭동, 전태일 열사의 분신등)
- 단위사업장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투쟁은 임금인상이나 부당해고 반대, 근로조건 개선, 그리고 노조결성과 활동보장 등이었다.
- 유신체제의 비상사태와 긴급조치로 상징되는 억압적인 정치체제와 집회, 데모, 노동자의 단체행동권이 제한 된 초법적인 탄압 속에서도 강고하고 치밀한 현장활동을 통해 키워진 조직력을 바탕으로 자본과 정권의 탄압에 맞서 꿋꿋히 민주노조를 사수했다.
- 경공업중심 여성노동자들이 투쟁의 중심이었으며 상급노조의 어용성과 부패에도 불구하고 종교단체와 학생들의 지원 속에서 개별사업장 중심의 민주노조 투쟁이 분산적으로 전개됐다. 이러한 경험은 80년대 노동운동에서 한국노총에 대별되는 민주노조운동의 상을 제시해 주었다.
- 그러나 70년대 민주노조투쟁은 전국적인 대중기반이나 연대기반을 갖고 있지는 못한 한계를 안고 있기도 하다
3. 새로운 투쟁을 향하여!
1) '서울의 봄'과 노동자 투쟁
암흑의 유신체제는 붕괴됐지만 12.12쿠테타를 통해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다시 등장했다. 그러나 1980년 봄이 오면서 공장과 학원에서는 군부독재 종식과 민주정치 실현을 외치는 민주화 기운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생존권 투쟁과 함께 노동조합 민주화 투쟁에 나섰다. (사북탄광, 일신제강, 동국제강, 인천제철 등)
5월 15일에는 학생과 시민 수십만명이 서울역 광장에 모여 계엄철폐, 유신세력 퇴진을 외치면서 사회민주화를 요구했다. 그러자 신군부는 5월 17일 비상계엄 선포지역을 전국으로 확대, 학생운동 지도부, 김대중을 비롯한 재야와 제도정치권의 주요인사들을 재빠르게 체포, 구속했다. 79.10.26. 79.12.12. 80.5.15. 80.5.17로 이어지는 격변의 역사는 마침내 5.18 광주로 이어져 거센 민중항쟁의 불길로 일어선다.
사북탄광 노동자 투쟁
80년 4월, 강원도 사북탄광에서는 노조지부장이 회사측과 짜고 임금인상을 20%로 낙찰시킨데 맞서 16일 부터 광부 30여명이 지부장 사퇴를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그러자 경찰은 이재기를 피신시키고 농성노동자들을 제지했다. 21일 세번째로 30여명의 노동자들이 농성을 벌이자 경찰 짚차가 광부 4명을 치고 달아 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시작했다.
동원탄좌 노동자 3천 5백여명과 2천 5백여 가족까지 합세하여 경찰을 4Km밖 고한까지 밀어내고 바리케이트를 쳤다. 고의로 광부를 친 사건은 '막장인생'이라 멸시 받던 광부들의 분노를 일시에 폭발케 했던 것이다.
분노한 노동자들은 이재기의 사택과 그를 지지했던 대의원들의 사택을 돌면서 집기를 부수고 이재기 부인(당시 소비조합장으로 생필품 강매와 매점매석으로 원성이 높았음)을 혼쭐을 내주었다. 또한 사북지서를 점거하고 무기고를 털어 무기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경찰 한 명이 사망하고 46명이 부상당했다. (당시 경찰발표)
사태가 심각하게 되자 강원도지사, 치안본부, 전국광산노조위원장, 광부대표가 협상을 시작. 임금인상, 상여금 인상 등 11개 항에 합의하면서 사북사태는 마무리되었다. 그 뒤 5월 5일 최규하는 대통령 권한대행의 '불법행동엄단' 발표와 함께 치안본부는 1백54명의 노동자를 연행하고 이중 28명을 구속하여 군법재판애 회부했다.
4일 동안 사북읍 전체를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는 등 폭발적인 투쟁으로 타올랐던 사북사태는 광업소 노동자들의 열악한 작업 실태와 어용노조와 자본, 경찰의 결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2) 죽음 넘고, 시대의 어둠을 넘었던 광주민중항쟁
신군부의 5.17 계엄확대조치는 '서울의 봄'으로 상징되던 민주화 운동을 한꺼번에 침묵케했다. 전국의 주요 거리와 대학에는 군인의 총칼과 탱크만이 가득했다.
계엄확대 뒤 태풍 전야 같은 침묵을 깨뜨린 곳은 광주였다. 광주, 전남지역은 높은 경제성장률에도 불구하고 경제발전이 크게 뒤떨어진 곳이었다. 게다가 박정희의 권력 독점 속에서 호남민중의 정치, 경제적 피해의식은 재야, 학생, 그리고 민중들로 하여금 어느 지역 못지 않게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갖게 했다.
또한 보수집단이 가장 꺼려했던 야당정치인 김대중이 이곳에 정치적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신군부가 정권창출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는 좋은 조건으로 작용하였다. 신군부는 계엄을 확대한 뒤 전국에서 터져 나올 지 모르는 민주화 요구를 '광주'라는 한 지역에서 폭발시켜 짓누름으로써 민주화 투쟁에 쐐기를 박고 유신체제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재편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광주 민중항쟁의 의의
- 신군부와 독점자본에 맞서 독재에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하고자 했던 민중항쟁으로서 신군부의 폭력성을 그대로 드러나게 했다.
- 또한 이전에는 미국의 본질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독점자본에 뿌리를 두고 있는 독재권력을 지지하는 미국의 실체를 드러냈다. 이것은 항쟁 뒤 반미투쟁, 수입개방반대투쟁으로 이어졌다.
- 투쟁과정에서 나타난 시민군의 '무장투쟁'은 항쟁의 지도부가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생명을 지키려는 하나의 수단이었지만 그것은 대중운동이 특정한 상황 속에서 무장투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개연성을 보여주었다.
- 또 민족민중운동의 이념, 동력, 대상, 방법 등 한국사회 변혁에 대한 근본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민족민중운동의 질적 발전을 이끌어 낸데 역사적 의의가 깊다.
3) 그러나 다시 불붙는 투쟁
폭압적으로 정권을 잡은 신군부는 1983년 국민화합이라는 명목아래 유화정책 펴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광주학살로 인한 정권의 정당성 결여와 외교적 압력을 완화하고 올림픽 개최 등 분위기를 조성해 가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블랙리스트 강화, 공단지역 주민조사 실시, 노조설립신고 필증교부 거부등 노동자들에 대한 억압적 통제는 지속됐다. 이에 과거 민주노조운동을 벌였던 사업장에서는 '블랙리스트 철폐 운동'으로 노동운동에 대한 불씨를 지폈고 이듬해 3월 10일에는 해고되었던 선진노동자들이 모여 '한국노동복지협의회'를 결성하여 노동법개정운동을 주도한다.
또한 절박한 생활상의 요구와 민주적 권리수호를 위해 집단적 저항도 나타났다. 1984년 5월 대구 택시기사들의 총파업이 전국 도시로 확산되면서 노동운동에 불을 지폈다. 1985년 들어서면서 대우자동차 투쟁 등 상반기 노동쟁의가 164건으로 앞 해에 견주어 120%나 늘었다. 투쟁양상도 대규모 사업장에서 투쟁과 연대파업이 일어나는 등 앞 시기와는 점차 달리하기 시작했다.
85년 6월 구로지역노동자 동맹파업
1985년 6월을 뜨겁게 달구며 구로지역의 노동자들이 동맹파업을 벌였다. 구로노동자동맹파업은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일어난 동맹파업이었다. 85년 6월 22일 구로공단에 있는 대우어패럴 노동조합 간부 세명이 경찰에 구속된 사건을 계기로 그 투쟁이 시작되었다.
구로의 노동자들은 대우어패럴 노조간부 구속이 단지 대우어패럴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들 모두의 문제라고 느꼈다. 그리고 '70년대 선배노동자들이 치열하게 짤 싸웠지만 따로 따로 싸우다 80년대 들어 모두 따로 깨지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역사의 경험을 되새기면서 연대투쟁으로 대응할 것을 결의하였다.
6월 24일 오전 대우어패럴노조가 파업에 돌입한 것을 시작으로 효성물산, 가리봉전자 등 9개노조 2,500여명이 '구속자 석방, 노동압법 철폐, 해고자 복직, 최저생계비 보장, 노동부장관 퇴진'등을 외치며 구로의 6월 파업투쟁에 참가하였다. 투쟁은 노동운동 단체들의 지지농성과 22개 사회단체들의 공동성명 채택등으로 확산되었다. 전두환 정권은 폭력경찰을 동원하며 강제해산하고 43명 구속, 2,000여명을 해고시켰다.
그러나 7일간의 구로동맹파업은 전두환 정권의 탄압 아래에서 동맹파업을 벌이고 지지연대투쟁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노동운동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구로동맹파업은 연대의 정신을 실천으로 보여주었고, 노동3권 보장과 노동부장관 퇴진 같은 정치적 요구를 내세웠으며, 노동조합에 바탕을 두면서도 대중적인 정치투쟁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가 있다. 또 구로동맹파업은 87년 7.8.9 노동자대투쟁과 그 뒤 활발하게 전개된 노동자 연대활동 연대투쟁의 밑거름이 되었다.
4. 87년 노동자 대 투쟁과 함께 시작된 민주노조운동
1) 6월 민주화 항쟁
1986년 2.12 총선에서 여소야대 국회가 만들어 졌고 그 결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론을 요구하는 개헌정국이 이어졌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자 전두환 정권에 대한 민중의 분노는 폭발하기 시작했다. 박종철군 추모대회, 고문추방 민주화 행진 등 집회에서 '직선개헌' '정권타도'를 외쳤다. 그러자 궁지에 몰린 전두환 정권은 지금까지의 모든 개헌 논의를 물거품으로 만드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4.13 호헌 조치에 맞서 변호사, 종교단체, 재야 등 사회 각계각층의 반대성명이 들불처럼 번져가는 가운데 5월 20일 천주교정의수현사제단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조작발표 되었다고 성명을 발표한다. 이것은 전두환 정권의 도덕성을 뿌리째 뒤흔들면서 6월 민중항쟁의 불길로 타올랐다.
6월 10일, 전두환 정권이 잠실체육관에서 '민정당 제4차 전당대회 및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를 열고 노태우를 다음 대통령후보로 지명하고 있을 때, 전국 22개 도시에서는 국민운동본부가 주관하는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직,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국민들의 열화와 같은 지지 속에 진행되고 있었다.
6.10 국민대회가 명동성당 집회, 18일 최류탄 추방대회, 26일 국민평화대행진으로 이어지면서 수십, 수백만 군중이 집회 대열에 합류했다. 결국 민족민중세력의 투쟁으로 전두환 정권은 직선제 개헌안을 받아들인 6.29선언을 발표한다.
2) 87년 7,8,9 투쟁을 동지여 기억하는가?
6.29 선언으로 투쟁이 주춤하고 있었지만, 노동자 투쟁은 6월 항쟁에서 확인한 민중의 힘에 대한 믿음과 군부독재 세력의 후퇴, 그리고 80년대에 다져진 역량을 발판으로 자연스럽게 터져 나왔다.
노동자 파업투쟁은 독점자본의 심장부인 울산에서 타올랐다. 7월 5일 현대엔진 노동자들이 서류탈취와 어용노조 결성에 맞서 투쟁에 들어간 것을 시작으로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등 현대그룹투쟁으로 확산되더니 마침내 부산, 마산, 창원, 구로, 인천 등 전국 공단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8월 들어 하루 400건이 넘는 쟁의가 터져 나왔고, 20일에는 하루 500건, 29일에는 743건이 되면서 노동자투쟁은 절정을 이룬다. 노동자투쟁은 제조업 뿐만이 아니라 광산, 운수노동자들 속에서도 격렬히 파업, 시위가 벌어졌다. 운동의 주력군도 여성노동자, 중소기업노동자에서 대기업의 남성노동자 중심으로 바뀌어 갔다.
이 기간에 무려 3,337건의 쟁의가 일어났는데 종업원 1천명 이상의 대규모 사업장 가운데서 75.5%에서 쟁의가 일어났다. 1987년 6월 말 2,742개이던 노동조합도 1989년 말 7,861개로 늘었고 조합원 수도 1백만명에서 190만여명으로 두배 가까이 증가했다.
7.8월 거세게 타올랐던 노동자 투쟁은 8월말 대우조선 이석규열사 민주국민장을 무력으로 해산시킨 것을 시작으로 가해진 정부의 강경탄압으로 수그러든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특징과 의의
- 하루 쟁의건수, 노조설립 수 등을 보더라도 87년 노동자 대투쟁은 한국전쟁 뒤에 벌어진 투쟁 가운데 그 규모가 가장 큰 전국적인 파업투쟁이었다. 또 제조업 대공장 노동자들이 투쟁에 앞장섰으며 사무전문직 노동자들도 노동운동 대열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 87년 이후 파업이 대부분 임금인상, 노동조건의 개선 등의 경제적인 요구 속에 출발했지만 이러한 경제적인 요구를 민주노조 건설이나 노동조합 민주화라는 자주적인 단결권 보장 요구와 밀접하게 결합해 투쟁을 전개했다.
- 특히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노조를 설립하기 힘들었던 상황이었음에도 '선파업 후교섭'을 통해 노동악법을 투쟁으로 무력화시켰고 투쟁의 성과로 민주노조운동을 꽃피우고 일상화시켰다.
- 기업별 노조체계에서 정부, 자본의 탄압에 맞서 강고한 연대와 단결로 투쟁을 엄호, 지지했으며 공장점거파업과 가두투쟁 등 강력한 전투성을 갖고 투쟁이 진행됐다.
4. 전노협에서 민주노총 건설까지!
1) 과거의 우리가 아니다.
97년 대투쟁을 경험한 노동자들은 더 이상 '주면 주는 대로, 시키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굴종적인 삶이 살지 않았다. '우리도 인간이다'. '사람답게 살아보자!' 라면서 억압과 착취에 저항하고 인간다운 삶을 확고하게 저항하였다. 노예의식이 아닌 계급의식과 과학적인 사상을 정립하면서 변혁의 힘있는 주체로 나섰다.
<표4> 87-89년 노동조합 조직현황
2) 노동자 전국 조직 건설 투쟁
⊙ 지역, 업종협의회 결성 : 87년 7~8월 대투쟁에서 89년까지
이 시기는 민주노조운동의 고양기로서 지역노조협의회와 업종노조협의회 결성 등 자주적 민주노조의 구심을 만들어 나가는 시기이다.
88년 지역, 업종별 연대만으로는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노동자들은 '전국노동법개정본부'를 결성하고 전국노동자대회개최 '노동법개정, '독점재벌해체'를 요구했다. 그리고 88년 하반기에 전국회의를 결성하므로 전국조직으로의 첫 발자국을 내딛는다. 또한 89년 해방 이후 최초로 세계노동절100주년 기념 한국노동자대회를 투쟁을 통해 조직한다.
이 시기에는 민주노조 사수를 위한 계급적인 연대가 활발했고 방어적이고 즉자적인 수준이기는 했지만 투쟁의 정치적 성격(노동법개정 투쟁, 공안합수부 폐지투쟁, 노태우 불신임 퇴진투쟁, 노동운동탄압분쇄투쟁)이 강화됐다. 이러한 투쟁을 통해 15개의 지노협과 9개의 업종협의회가 조직되었다.
⊙ 전노협, 업종회의 탄생 : 90~92년
1990년 1월 22일, 마침내 민주노조운동의 중앙구심 전국노동조합협의회가 결성되었다. 전국 14개 지역 노동조합협의회와 2개 업종별노조협의회 소속 총 602개노조, 19만 3천여 조합원을 포괄하는 조직이 결성 된 것이다. 이는 비록 13개 업종별 노동조합 전부를 포괄하지는 못하지만 민주노조운동의 확고한 구심과 추진력이 만들어 낸 쾌거였다.
한편, 전체노동자의 40%를 차지하는 사무전문직노동자들도 1990년 5월 KBS노조의 방송민주화 투쟁과정을 거치면서 '전국업종노동조합회의'를 조직하여 사무전문직 노동자들의 정치, 경제적 이익을 대변해 나간다.
조직건설과 90년 KBS, 현대중공업의 골리앗 투쟁, 전노협 총파업으로 이어지는 투쟁 과정 속에서 노동자들의 자생적 투쟁은 종지부를 찍고 조직적인 투쟁면모를 갖추게 된다.
이러한 조직결성과 투쟁은 민주노조총단결의 기운으로 이어졌다. 90년 하반기 전노협과 업종회의가 공동주최한 전국노동자대회에서 '노동운동탄압 분쇄와 91년 임,단투 승리를 위한 민주노조총단결'을 전면으로 내걸음으로서 생산직노동자와 사무전문직노동자가 민주노조총단결을 위해 투쟁해 나가는 계기를 만든다.
전노협 사수를 위해 투쟁하다 숨져 간 박창수 열사
한진중공업 노동자 박창수는 1990년 위원장선거에서 93%의 압도적 지지로 위원장에 당선된다. 그러나 그의 앞길은 순탄치 않았다. 전노협 와해공작(1990년)에 실패한 노태우 정권은 이듬해 현장과 지역부터 무력화시키는 공작에 착수했다. 그 첫 대상은 영남권. 당시 대기업 가운데 전노협 가입노조는 한진중공업이 거의 유일했고, 현장노동자들의 두터운 지지를 바탕으로 전노협과 부산지역 노조운동의 핵심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 때문에 한진중공업노조 탈퇴공작은 전노협을 약화시키는 핵심고리였다.
1991년 2월13일. 박창수는 대우조선 파업 지원방안을 '논의'했다는 이유만으로 전노협, 대기업노조 연대회의 간부 6명과 함께 구속됐다. 그리고 회유와 협박을 통한 탈퇴공작은 계속됐다. 심지어 인신매매범을 한방에 수용해 부인을 납치하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4월25일에는 부산의 한 카페에서 안기부 조정관이라는 사람이 노조 간부들을 두 차례 만나 전노협을 탈퇴하면 박창수 위원장을 석방할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던 5월4일 박창수는 이마가 6cm 쯤 찢어져 안양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이때부터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 5일, 안기부 직원이 입원실로 세 차례 전화를 걸어왔지만 교도관의 제지로 그의 부친과 노조 장세군 사무국장하고만 통화가 이루어지는 등 안기부 요원의 부산한 접촉시도가 있었다. 그리고 6일새벽, 병원 마당 시멘트 바닥에서 박창수의 시신이 발견됐다. 정부 기관은 투신자살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아무도 '투신자살'을 믿지 않는다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기 전에는 시신을 내줄 수 없다는 것이 유족과 노동자들의 주장. 하지만 검찰은 영안실 벽을 해머로 부수고 들어와 강제부검을 실시한 뒤 일방적으로 수사종결을 선언했다. 그 동안 가족들은 음식물반입조차 금지 당한 채 병원 한쪽방에 몇 일 동안 갇혀 있었다. 검찰의 발표는 그가 노동운동에 회의를 느껴 투신자살을 했다는 것. 그러나 링거를 꽂은 채 투신했다는 것도, 6층에서 뛰어내렸다고 보기 어려운 파편의 흔적도 의문이려니와 특별한 외상도 발견되지 않았다. 타살이 분명했지만 사건의 열쇠를 쥔 노조 사무국장은 자취를 감춰버렸고, 부검사진 한 장 넘겨받지 못했다.
민주노조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겼던 노동자 박창수. 그는 정권의 서슬퍼런 '전노협 와해공작' 앞에서도 조직을 사수하기 위해 목숨 바쳤던 진정한 노동운동가였다.
(노동과 세계 196호)
⊙ 대공장연대회의
1990년 말, 민주노조 투쟁에 힘입어 대우조선, 포항제철, 만도기계, 대림통상, 아세아자동차등 대공장노조에 민주집행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를 토대로 '대기업노동조합 연대회의'가 만들어지고 전노협과 전국임금인상공동투쟁본부를 구성하여 활동을 전개한다. 이 과정에서 한진중공업노조 박창수위원장이 옥중 의문사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 이에 민주노조 진영은 91년 경찰에 의한 강경대 타살사건과 함께 91년 5-6월 투쟁으로 떨쳐 일어난다.
⊙ ILO공대위
한편 91년 하반기 정부의 ILO가입을 계기로 전노협과 업종회의, 노동단체가 공동으로 노동법 개정을 위한 ILO기본권 조약비준 및 노동법 개정을 위한 전국노동조합 공동대책위원회'를 만든다. ILO공대위는 정권과 자본의 신종임금억제정책인 '총액임금제' 공세에 맞서 전국적인 공동대응을 위해 420여개 노조가 모여 총액임금제 분쇄 대책위원회를 꾸리고 정권과 자본의 노동운동에 대한 제도적, 정책적 탄압에 맞서 나갔다.
ILO 공대위는 전국노동자들의 노동법개정투쟁 결의를 모아내기 위하여 92년 전국노동자대회를 ILO가 포괄하지 못한 노동조합들까지 모아 공동으로 치루기로 한다. 그 결과 16개 지역과 14개 업종의 1,071개 노조 (조합원 40만명)가 되어 전국노동자대회에는 5만여 노동자가 참여한 가운데 성황리 개최되었다.
이날 대회에서는 '자주적 산별노조에 기초한 전국중앙 조직건설'이라는 공동의 조직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산별노조 건설과 민주노조 총단결 사업에 박차를 가할 것'을 공동의 과제로 천명하였다.
⊙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 (93.6.1)
정권과 자본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성장한 민주노조 진영은 1993년 92년 전국노동자대회조직위원회 성과를 바탕으로 임금인상, 노동법개정투쟁, 고용보장, 사회개혁투쟁등 전국 노동자들의 생존과 직결된 공동사안을 놓고 통일적인 대응과 함께 강력한 결집을 위해 단일한 대오가 필요하다는데 뜻을 모은다. 그 결과 전노협, 업종회의, 현총련, 대노협이 모여 1993년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를 구성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전노대는 노·경총의 사회적 합의 반대투쟁을 어용노총 해체 투쟁과 탈퇴운동으로 결합시켜 내면서 임금인상투쟁을 집중시켜 나간다. 이 시기는 민주노조의 조직 발전 모색, 준비하는 시기로서 민주노총, 산별조직 건설을 위한 조직발전 경로와 발전을 위한 논의가 집중된다.
⊙ 94년 11월 전국노동자대회에서 민주노총 준비위를 발족
94년 6월 [전국기관사협의회]소속 철도노동자들과 지하철노조의 연대투쟁은 '공기업 3% 임금억제정책 철폐, 근로기준법의 준수, "해고자 원직복직' 등 공동요구에 기초한 공동파업을 전개함으로써 업종별 공동투쟁의 새로운 모범을 보여 주었다.
전지협 연대파업투쟁은 부산의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LNG 선상파업투쟁, 광주의 금호타이어 노동자들의 파업투쟁, 대구의 대우기전 노동자들의 파업투쟁 등 각 지역별 대공장노조의 파업투쟁으로 이어져, 김영삼정권의 임금억제정책과 노사협조정책을 실력으로 무력화시켜 나갔다.
사무·전문직 노동자들은 '업종별 교섭', '사회개혁투쟁', '단일 산별노조의 건설 및 연맹의 합법화'라는 형태로 민주노조운동의 새로운 경험을 축적시켜 나갔다. 병원노련과 전문노련은 기업별 노조체계 하에서 집단교섭을 성사시킴으로 업종별 공동투쟁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며, 전국과학기술노조, 전국의료보험노조 등은 단일 산별노조(소산별)를 건설하고, 합법성을 쟁취함으로써 산별노조 건설의 전망과 가능성을 현실로 보여주었다.
사무 전문직 민주노조운동의 경우, 의료제도의 개선, 완전한 사회보장의 실시, 언론 민주화 등 사회개혁 요구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서 노동조합의 사회적인 역할을 부각시키고, 노동자의 정치의식을 고양시켜 나갔다.
94년, 공공부문 노동조합운동이 활성화되었다. 그 동안 정부의 임금 가이드라인 정책의 선도사업장으로 정부의 임금통제정책의 희생양이 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공공부문'이라는 이유로 노동3권마저 심각하게 제약 당해 왔던 공공부문 노동자들은 94년 상반기 철도노동자들의 연대투쟁을 출발로 한국통신 노동조합의 민주화, 조폐공사 노조의 파업투쟁 등을 계기로 공공부문에서의 민주노조운동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마침내 11월 4일에 142개 노조, 21만 조합원을 포괄하는 [공공부문노조 대표자회의]를 결성하였다.
87년 이후 민주노조운동을 통해 성장한 수천의 대중 지도력과 대중적인 공동투쟁의 경험, 계급의식의 발전은 새로운 형태의 단결을 요구하였다. 더구나 민주노조 사수 투쟁이라는 방어적인 투쟁과 시기집중에만 머무는 소극적인 전술을 뛰어넘어 총자본과 총노동의 대립을 실질적인 투쟁 전선으로 전화시켜 내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기업별 노조의 틀로는 더 이상의 계급적인 단결과 공동투쟁을 조직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한편 대중적인 어용노총 탈퇴운동은 민주노조운동이 명실상부하게 노동조합운동의 조직적 구심으로 서 나갈 것을 요구하였다. 94년 11월 13일, [민주노총 준비위]는 이러한 배경에서 출범하였다.
⊙ 민주노총 건설
민주노총준비위원회를 발족 1년 만인 1995년 마침내 생산직과 사무직, 대기업과 중소기업, 공공부문과 민간기업을 망라하여 15개 산업별(업종) 조직과 8백 61개 노조, 조합원 41만 8천 154명으로 산별노조 건설의 견인차가 될 민주노총을 건설한다.
민주노총 건설의 역사적 의의
- 민주노총의 출범은 무엇보다도 87년 이후 한국노동조합운동사에서 한국노총에 반대하는 민주노조운동노선이 정권과 자본의 탄압을 뚫고 승리를 쟁취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 또한 민주노총은 노동조합운동의 '질적인 전환을 준비하는 조직적 구심체'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다. 노동조합운동의 질적인 전환이란 자본과 정권의 노동통제수단인 기업별 노동조합체계를 극복하고 산업별 노조건설을 위한 구심체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 현재 60만이 넘는 조합원을 아우르고 있는 민주노총은 이제 이 사회에서 명실상부한 대안세력으로의 등장했다는 것이다. 즉 이 사회 전체의 근본적인 변혁을 실질적으로 수행해 나갈 수 있는 주체로서 성장을 요구받고 있다.
<표5> 민주노총 소속 노동조합 연도별 조직현황
주) 2001년도 조직현황은 노조수가 아닌 사업장수로 대신함
5. 신자유주의 공세와 노동자투쟁
1) 90년대 초 신경영전략 - 96년 노동법 개악 - 98년 신자유주의
87년 노동자투쟁 직후에 폭발적인 노동자파업에 놀란 자본가들은 노동시간단축이나 임금인상으로 노동자의 요구를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저임금·장시간 노동에 기초한 자본축적체계의 변화를 모색해 나갔다.
90년대 이후 본격화되는 자본의 세계적 경쟁 속에서 저임금·장시간 노동에 기초한 기존의 자본축적은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었고, 국내 독점자본의 생존을 위한 자본축적체제의 변화는 불가피했다. 파업투쟁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들의 저항은 이 변화과정을 단축시킬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자본축적체제의 변화는 90년대 초 노태우 정권에서 시작하여 김영삼 정권의 세계화 구상, 그리고 IMF경제위기를 계기로 김대중 정권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으로 완성됐다. 자본가들은 기존의 병영적·가부장적 노무관리로는 더 이상 노동자계급을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없게 되자, 새로운 노동통제전략을 모색해 나갔다. 그것이 1990년대 초 민간대기업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던 '신경영전략'이다. 현장통제 강화와 기업문화를 통한 노동자 포섭을 핵심 내용으로 하는 '신경영전략'은 이후 총자본차원에서 수렴되면서 김영삼 정권은 '신노사관계'에 따른 '노사관계개혁위원회'로 실험했으나 노동법 개악에 저항하는 96∼97총파업으로 좌절되었고, 이후 김대중 정권에 이르러서는 '노사정위원회'와 '신노사문화'로 구체화되고 고도화되어갔다. 김대중 정권은 IMF경제위기를 빌미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공세를 전면화, 일상화, 제도화하고 있다.
2) 96-97년 노동법개악 저지 노동자총파업 투쟁
김영삼 정권의 '노사관계위원회'와 '신노사관계', 노동법 개악 정책은 97년 대선에서의 정권재창출을 위한 정국주도권 장악 음모 속에 1996년 12월 26일 정리해고법을 핵심으로 한 노동법과 안기부법 날치기 통과를 강행했다.
이에 맞서 민주노총은 12월 26일 민주노총 총파업 투쟁을 선언하고 전국적 총파업 투쟁으로 맞섰다, 3단계에 이르는 끈질긴 투쟁 끝에 1997. 3. 국회에서 노동악법 재개정되어 통과된다. 이러한 파업 투쟁이 가능했던 것은 '정리해고'에 대한 법적 제도화에 대한 노동자들의 높은 위기 의식과 이러한 위기의식을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모아냈기 때문에 가능했었다.
또한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대중투쟁동력으로 확산 된 이 투쟁은 노동자 투쟁에만 머물지 않고 민족주의 세력 결집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96-97년 노동자총파업투쟁의 역사적 의의
- 파업참가 누적규모가 3,206개 노조, 359만7,011명에 이르는,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정치총파업이었다.
- '노동악법 전면무효화'라는 정치적 요구를 중심으로 전체 노동자의 이해와 단사별, 지역별, 업종별, 산업별 이해를 일치시켜 전국총파업 투쟁이었다.
- 96∼97년 총파업투쟁은 "실질적 민주주의(사회·경제적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와 정치적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를 결합시킨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투쟁으로서 기존의 민주주의투쟁과는 다른 성격을 띠고 있다.
- 87년 6월 민중항쟁에서 소위 넥타이부대라 일컬어지는 사무전문직 노동자들의 경우 하나의 '시민'으로 민주주의투쟁에 참여했지만, 96-97총파업투쟁에서는 투쟁의 주체로서 조직적으로 투쟁에 나섰다.
- 투쟁의 형태에서도 "민주노총의 조직적인 준비를 통한 총파업투쟁이 중심이 되어 가두 집회와 시위를 결합하고, 이를 노동자들이 중심에서 주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투쟁모습을 보여 준 신자유주의에 맞선 정치총파업 이었다.
3) 신자유주의 공세 속, 노동자 투쟁
1997년 IMF구제금융이라는 국가부도 위기를 맞이했다. 그로부터 5년여, IMF 구제금융을 조기 졸업하겠다던 김대중 정권의 약속은 구조조정과, 정리해고, 비정규직과 실업자 양산이라는 화살이 되어 돌아왔다.
김대중 정부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정책은 노동, 기업, 금융, 공공부문으로 종횡무진 이어졌다. 그 결과 초국적 자본에게는 모든 자유를 보장하고, 노동자들에게는 생존권 말살과 극심한 현장통제, 노동강도 강화를 가져다 주었다.
또한 한 손에는 노동유연화, 임금유연화의 칼날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노동자 감시와 통제라는 칼날을 들고 구조조정이라는 거대한 몸집으로 무장하여 노동기본권은 물론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벼랑으로,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그렇게 IMF와 IMF의 충실한 심복 김대중 정권은 노동자들이 수년간 투쟁을 통해 쟁취한 성과물을 빼앗아 가고 있다.
그 과정에서 노사정 위원회는 노동자들을 배재시키고, 노동자들을 구조조정 대상으로 삼아 정부, 자본의 구미에 맞게 구조조정을 완성하는데 철저히 복무하였다. 결국 노사정위원회는 사회적 합의 모델을 만들어 보겠다던 취지는 간데 없고 노동기본권 마저 인정하지 않으려는 정부, 자본의 탐욕 앞에 순종하고 만 것이다.
민주노총은 97년 11월 IMF 외환위기 이후, 김대중 정권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공세와 노사정위원회를 중심으로 하는 허구적인 사회적 합의전략에 맞서 총파업과 총력투쟁으로 완강히 맞서왔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에도 불구하고 지난 국가기간산업 사유화 저지를 위한 4월 2일 파업철회 과정에서 드러났듯 치열한 투쟁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맞선 민주노총의 대응과 투쟁은 많은 한계와 과제를 드러내고 있다. .
- 1997년 11월 IMF 경제위기
- 1998년 5월 총파업투쟁
- 1998년 9월 현대자동차 정리해고저지 파업투쟁 / 10월 만도기계노조 파업
- 1999년 민주노총 총력투쟁
- 1999년 4월 서울지하철 파업투쟁
- 1999년 10월 한라중공업노조 파업
- 2000년 3-4월 자동차3사 노조 연대파업
- 2000년 12월 금융노동자파업, 한국통신노동자 파업
- 2001년 2월 대우자동차 노조 정리해고저지 파업투쟁
- 2002년 공공3사 공동파업과 발전노조 투쟁
6. 마치며...역사는 동지들에게 묻는다.
70년대 이후 노동운동사는 "나는 그때 거기서 무엇을 했었는가?" 또한 "지금 여기어 어떻게 살아가고 잇는가?"를 자꾸 되묻게 한다. "그때 거기"는 우리들에게 있어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이며 나의 삶과 동일선상에 있는 사건이자, 역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걷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노동운동 역사를 만드는 것이고, 우리가 밟아 가는 길이 우리 사회가 나가는 길"이라고 할 때 70년대 이후 역사 속에는 바로 내가 있었지 않았던가?
다름 아닌 우리가 "그때 거기"에 있었고 "지금 여기서"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임을 되새기며 역사의 물음에 귀 기울이자.
1) 굳건히 연대하고 있는가?
지난 투쟁 과정은 노동자 계급의 연대와 단결의 역사였다. 중소영세.대공장 없이, 여성.남성 없이, 정규직.비정규직 없이, 사무직.제조업 없이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단결하고 연대해 왔다.
그러나 갈수록 정부, 자본은 노동자와 노동자 사이에 금을 긋고 벽을 만들어 놓으며 단결과 연대를 가로막고 있다. 노동자 계급이 연대 할 때 만이 전 민중의 연대투쟁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2) 노조간부로서 이념과 사상을 정립하고 있는가?
혹독한 탄압, 노동자라는 이름마저 꺼내기 힘들었던 시절을 뛰어 넘어 오늘날의 역사발전이 있기까지 이론과 실천으로 무장한 활동가, 선진노동자들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이념과 사상이 있었기에 모진 고문과 탄압을 견딜 수 있었고, 역사를 내다보는 계급적 안목이 있었기에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오늘날 민주노조를 하는 동지들은 무슨 생각을 갖고 민주노조 운동에 복무하고 있는가? 정부, 자본과 싸워 맞설 이념과 사상의 무기는 준비되어 있는가?
3) 끊임없이 조직하고 있는가?
혹독한 탄압의 시기에는 숨죽여 조직했고, 민주노조 꽃피는 시절에는 민주노조로 단결하여 조직활동의 꽃을 피웠다. 항상 조직하고 실천 할 줄 아는 조직만이 희망이 있을 수 있다. 노동조합 간부의 기본책임은 조직이다. 현재에 안주하지 말고, 끊임없이 나아가 조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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